"중국이 정부의 지원과 거대 자본을 앞세워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향배는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습니다."

2015년 11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신성장포럼. 세계 2위 종합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김기남 사장이 반도체 위기론을 들고나오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김 사장은 “중국의 반도체 시장 진출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고 우려했다. 그 자리에 모인 반도체 전문가들은 김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자본과 시장을 앞세운 중국의 반도체 굴기(우뚝 섬)가 시작됐다. 그 힘은 ‘무어의 법칙(Moore's law) 폐기’로 상징되는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와 맞물려 더 세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세계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와 인텔이 최첨단 미세 공정을 이용해 반도체의 집적도를 높이며 치고 나가면, 후발주자들이 뒤쫓는 구도였다. 그러나 무어의 법칙 폐기로 치열했던 집적도 경쟁이 퇴조하면서 선두주자들과 중국과의 기술 격차도 좁혀지고 있다. 또 기기끼리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등의 활성화로 반도체 수요처가 다변화하면서 ‘자본, 인적 자원, 시장’이라는 3박자를 갖춘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주창한 무어의 법칙은 1년6개월마다 반도체 집적도가 2배로 늘어난다는 것으로 반도체 기술 개발을 이끈 표준 로드맵이었다. 반도체의 집적은 한정된 면적에 보다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어넣는 작업이다. 집으로 비유하면 동일한 면적에 보다 많은 방을 짓는 것으로 더 많은 기능을 더 작은 칩에 넣는 경쟁이었다. 하지만 PC 시대의 퇴조(退潮)와 반도체 수요처의 다변화, 기술적 한계 등으로 집적도 제일주의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18개월마다 트랜지스터 개수가 2배 집적되고 컴퓨터 성능도 개선된다는 무어의 법칙. 수십 년 동안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산업의 표준 ‘로드맵’이었다.

◆ 中 반도체 ‘중궈멍(중국의 꿈)’은 ‘자급자족’

중국은 세계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의 절반 이상을 쓰는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이다. 컨설팅회사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2014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56.6%였다. 반도체는 2013년에 원유를 제치고 중국의 제1수입품이 됐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숙원 사업으로 삼은 배경이다.

중국은 1990년대 국가 주도로 반도체 국산화 작업에 착수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급률은 한자릿수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분위기는 2012년 5월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전략적 7대 신성장 산업’을 발표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육성하기 위해 2020년까지 연간 총 9000억위안(약 166조원)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는 게 골자였다.

연구 개발의 방향은 한국이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한 메모리 반도체가 아닌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였다. 공장없이 반도체 설계만 하는 다양한 팹리스 업체들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핵심이다. 중국 정부는 위탁생산(파운드리) 계약부터 설계 도구, 인력 확보 등 반도체 생태계 대부분을 지원했다. 중국 정부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에는 모두 중국산 반도체만 쓰도록 자국 산업 보호 정책도 펼쳤다. 시장조사업체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2014년 20% 수준에서 2025년 70%대로 급등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정부의 뒷받침으로 중국 팹리스 업체와 파운드리는 급속히 성장했다. 시장조사기관 아이서플라이는 올해 중국 팹리스 시장 규모는 2010년보다 2배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 팹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7%로 3위에 올랐다. 중국 하이스와 스프레드트럼은 각각 세계 팹리스 12위와 16위에 이름을 올렸다. 상위 20위권 안에 한국 회사는 단 한 곳도 없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중국 SMIC가 삼성전자에 이어 5위였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의 신성장 산업 발표 시점이 무어의 법칙 효력이 떨어지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효과를 봤다고 분석했다. 미세 공정 기술 발전 만을 쫓는 무어의 법칙 시대에서 벗어나면서 후발주자들의 뒤처진 공정에 대한 쓰임새가 늘었기 때문이다. TV에 쓰이는 전력반도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터치칩 등은 굳이 최첨단 미세 공정라인에서 생산할 필요가 없는 제품들이다. 낮은 수준의 기술부터 차근차근 섭렵한 중국 팹리스와 파운드리들은 현재 시스템 반도체의 꽃이자, 모바일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만드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베이징대, 칭화대 등 중국 일류 대학에서 매년 배출하는 대규모의 연구 인력은 중국 반도체 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중국의 과학기술 인력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4200만명 수준이다. 전문 연구·개발 인력만 190만명에 달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시스템 반도체는 적합한 인력만 있으면 금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인데, 인력은 자본이 있으면 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며 "자본이 있는 중국이 돈으로 기술과 인력을 사들이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따라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中 자국 기업 밀어주기 심해…중국·대만·일본 연합도 나와

‘앞에서 끌고 뒤에 밀어주는’ 중국 업체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도 중국 반도체 산업의 빠른 성장을 이끄는 요인 중 하나다. 화웨이는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전자의 14나노 공정보다 TSMC의 16나노 공정으로 만든 칩의 성능이 더 뛰어나다"며 대놓고 중화권 기업을 밀어줬다. 팹리스들도 마찬가지다. 대만 팹리스 미디어텍(MediaTek)과 중국 팹리스 하이실리콘, 스프레드트럼은 10나노 공정을 활용한 AP의 위탁생산을 TSMC에 맡겼다.

중국과 일본, 대만 3국이 손잡고 한국에 맞서는 경우도 있다. 일본 반도체 설계업체 시노킹테크놀로지는 지난 3월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시 정부와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합의했다. 시노킹은 한때 삼성전자와 어깨를 견줬던 일본 메모리반도체 제조사 엘피다의 사카모토 유키오 전 사장이 설립한 회사다. 이 회사의 핵심 인력 대부분은 대만 국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중국, 대만이 합쳐 D램 강국 한국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러한 연합군 작전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점유율에 당장 악영향을 주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그나마 앞선 편인 일본과도 D램과 낸드플래시 공정 기술상 1년 이상의 격차를 벌려놓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D램 시장에서 지난해 4분기 기준 합산 점유율 74.3%를 기록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노리는 분야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차세대 먹을거리인 사물인터넷(IoT)용 반도체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연합군이 저전력이 필수인 IoT용 반도체를 저가로 공급하면 이 시장을 선점할 수도 있다.

◆ 韓 텃밭 메모리도 노리는 中

중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의 텃밭인 메모리 반도체 육성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후베이성 정부가 설립한 XMC는 우한에 3D(3차원) 낸드플래시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투자금액은 240억달러(27조4300억원)다. 칭화유니그룹도 광둥성 선전에 D램과 낸드플래시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D램은 칩 설계, 소재, 공정 전반에 걸쳐 기술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하지만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면 대규모의 매출과 이익을 낼 수 있다. 중국이 현재 수입에만 의존하는 D램을 자급자족하게 되면 막대한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두게 된다.

중국이 D램보다 낸드플래시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이 낸드플래시에 주목하는 이유는 장기적으로 D램보다 낸드플래시 수요가 빨리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낸드플래시는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져도 저장된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장점이다. 시장조사기관 IHS에 따르면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은 2019년까지 2%대를 유지할 것으로 추산됐다. D램의 2배 수준이다.

또 D램은 이미 3개 업체의 과점 체제가 굳어져 있는 상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9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반면 낸드플래시는 이보다 많은 6개 업체가 경쟁하기 때문에 후발 주자가 뛰어들 여지가 더 많다.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컴퓨터 저장장치로 쓰이는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수요가 있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