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직접 만나서 결론 내겠습니다.”

지난 달 한진해운에 대한 재무구조 개선 논의가 난항에 빠지자,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내가 직접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만나겠다”고 말했다. 지난 2월 12일 취임 이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산업은행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던 이 회장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산업은행과 한진그룹은 한진해운의 유동성 상황을 놓고 대립 중이었다. 산은은 최소 5000억원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한진해운은 현재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맞서는 상황이었다. 해운업은 점점 나락에 빠지는데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다.

이 회장은 3월 말 어느 날 오후 조 회장을 비공개로 만났다. 조 회장은 2013년 이후 한진해운에 1조원 이상을 쏟아부은 상태였다. 이 회장은 한진해운에 애착이 컸던 조 회장을 설득했다.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선 경력이 전무하다는 약점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회장은 정치권에 기대지 않고 조 회장을 직접 만나 정면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회장이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중에 선택하라'며 압박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도 산은 임직원들 사이에선 회자된다.

한진 관계자는 “재무 담당자들은 회장이 무서워서 한진해운을 버리자는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는데 이동걸 회장은 단숨에 결판 지었다”며 놀라워했다.

◆ 한진해운에 애착 컸던 조양호 회장을 2시간 동안 설득

이 회장은 박근혜 캠프에서 일했던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월 산은 회장으로 내정됐을 때 내부에서는 ‘보은성 인사’라는 반발이 심했다. 이 회장은 스스로 “낙하산이라는 지적에 대해 일정 부분 동의한다”면서도 “(나는) 금융업에서 40년간 일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18일 이동걸 회장 취임식

1948년생인 이 회장은 일흔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주변에 깍듯이 인사하고 말단 직원에게도 웃으며 응대한다. 그래서인지 산은 직원들은 이 회장이 다소 ‘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는 평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취임 두 달 여 만에 이 같은 평가는 사라졌다.

구조조정만 해도 취임 이후 곧바로 현대상선, 한진해운으로 하여금 용선료 협상에 착수하게 했고, 대우조선해양에 대해서도 추가 자구안을 내놓도록 조치했다. STX조선해양은 연말쯤 법정관리(회생절차)로 보낼 수 있다고 명확히 했다. 현대중공업에도 경영개선 계획을 받아내겠다고 한 상태다.

이 회장과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이 회장이 강단 있는 인사라는 평을 내놓는다. 한일은행 출신인 이 회장은 신한은행, 신한캐피탈, 신한금융투자에서 일했다.

신한금융 관계자는 “경영 현안이나 인사를 놓고 경영진과 마찰을 빚는 일이 많았다”면서 “본인이 확실하다고 판단하면 최고경영자의 지시라도 대놓고 반대하는 보기 드문 스타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 회장이 신한을 떠난 것도 결국 CEO와의 잦은 마찰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2019년 종료되는 임기 내에 우리나라 경제의 틀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산은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전체 기업 대출(82조원)의 12.4%를 이자도 내기 버거운 부실기업에 집행한 상태다. 대기업 대출 비중도 47.5%에 달한다.

이 회장은 “부실기업 연명에 돌아가는 자금을 벤처 등 창조경제 기업에 돌려야 한다”며 “그래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밝혔다.

◆ “대선까지 정치권 압박 견뎌낼지 지켜봐야” VS “넥스트 없는 사람이라 문제 없다”

일부에서는 대선 정국까지는 지켜보고 이 회장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는 유일호 부총리,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 정부 인사들이 이 회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국이다. 이 회장이 스스로 판단하고 조치를 취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지금은 여야를 불문하고 구조조정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 회장의 운신의 폭이 넓다”면서 “다만 구조조정 이슈가 대선 정국까지 이어지면 정치권의 간섭이 커질 것이고, 이 때 이 회장이 어떻게 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이 회장과 한일은행에서 같이 일했던 금융권 관계자는 “이 회장은 산은 회장 이후의 넥스트(NEXT·추후 새로운 자리로 승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며 “본인이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잘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권위 내세운 다른 회장들과 달라…산금채 모델도 자임

이동걸 산은 회장은 지난달 24일 산업은행의 산금채 특판 모델로 자원했다. =산업은행 제공

산은 내부에서 이 회장에 대한 평가는 호평 일색이다. 보고를 받을 때도 큰 소리를 치지 않고 직원을 배려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노조만 해도 취임 당시까진 “낙하산 인사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현재는 잠잠해졌다. 일부에서는 “이 회장이 노조에 엄청난 약속을 해준 모양이다”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이 회장의 소통 의지에 노조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 뿐이란 얘기가 많다. 이 회장은 신한은행에서는 인사부장, 한일은행에서는 인사과장을 역임했던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노조와의 교감 능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성과주의 도입 이슈로 인해 이 회장과 노조의 사이는 살짝 벌어져 있는 편이다.

이 회장은 지난 달 산금채 특판 모델로도 나섰다. 회장이 직접 금융상품 모델로 나선다는 것은 과거 권위를 내세웠던 산은 회장들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다소 파격적이다. 산은 관계자는 “회장이 직접 모델을 하겠다고 제안했다”면서 “산금채를 통해 구조조정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회장도 홍보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