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투자 고객을 찾습니다.'
2006년 4월 18일, 주요 일간지 전면에 이런 광고 문구를 내건 펀드가 출시됐다. 국내 최초 가치투자 전문 운용사를 표방한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 출범과 동시에 내놓은 펀드 '한국밸류 10년투자 주식투자신탁1호'였다. 가치투자란 실적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된 회사를 찾아내 장기로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광고 모델은 이 펀드를 굴리는 펀드매니저 이채원(52). 현(現)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이다.
가치투자를 지향하는 이 펀드는 다른 펀드와 달리 3년 이내 환매할 경우에는 수수료를 부과했다. 펀드 이름에까지 '10년'을 넣어 장기 투자할 고객만 모았다. 1038억원으로 시작한 펀드 설정액이 딱 10년 흐른 2016년 4월 18일 현재 1조5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설정 후 누적 수익률은 155%.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상승률(40%)의 약 4배에 달한다. 2006년 당시 정기예금 금리 수준인 연 5%로 은행에 돈을 맡기고 그동안 5% 금리를 계속 유지했다고 쳐도 10년간 수익률은 63%(세전·연 복리 기준)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우 이미 전설적인 장기 투자자들이 많이 나왔다. 1954년 세계 최초의 글로벌 펀드인 '템플턴 그로스 펀드'를 설립해 1992년 은퇴할 때까지 연평균 14.5%의 수익률을 기록한 존 템플턴, 1965년 투자사 버크셔 해서웨이 인수 후 50년간 가치주 투자 등으로 연평균 20.8%의 수익률을 올린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등이 그들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펀드 열풍이 불었다가 사그라들어 펀드의 평균 보유 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국내 투자 환경에서 한 펀드를 10년간 변함없이 굴려온 펀드매니저는 이채원 부사장이 유일하다. 그러면서도 수익률이 코스피 상승률이나 은행 정기예금 금리를 훨씬 웃도는 성공을 거둔 비결에 대해 이 부사장은 다소 싱겁게도 '고객 신뢰'와 '가치투자의 저력'을 꼽았다. "크고 작은 시련이 있었지만, 믿고 기다려준 고객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10년펀드를 굴린 펀드매니저도 고집스럽지만, 여기에 돈을 맡긴 투자자들도 옹고집이긴 매한가지다. 3만3000여 계좌 가운데 67.5%가 5년 이상 투자하고 있고, 펀드 출시 첫해 가입한 계좌 9920개 중 22%가 계좌를 유지하고 있다. 이 부사장은 "시장을 전망할 재주도 없는데, '헐값에 사서 제값에 파는' 가치투자가 소심한 내게 딱 맞는 옷이어서 지금도 이 길을 간다"고 했다. 이어 "국내엔 여전히 저평가된 가치주들이 많고, 이들 주가는 오른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펀드 운용자이면서 투자자다. 갖고 있는 금융자산을 몽땅 10년투자 펀드에 맡겼다. 동원투신운용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던 그는 1998년 가치투자 대부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책 '현명한 투자자'를 읽고 가치투자 외길로 뛰어들었다. 그레이엄이 '주식으로 돈을 버는 법'으로 언급한 '규칙 제1조: 돈을 잃지 말라. 규칙 제2조: 제1조를 잊지 말라'를 접하고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했다.
1998년 12월 국내 최초로 가치주 펀드를 출시했지만 1999년 가치주와 거리가 먼 기술주·닷컴 버블(거품)로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그는 "127%까지 갔던 수익률이 100% 아래로 떨어지니 고객 항의가 빗발쳤고, 온몸에 병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듬해인 2000년 동원증권으로 자리를 옮겨 증권사 고유 자산 700억원을 운용하며 절치부심했고, 이어 2006년 증권사를 떠나 다시 내놓은 상품이 바로 '10년투자 펀드'다. 8년 전과 달리 장기 투자할 고객만 모았다.
10년투자 펀드도 위기가 있었다. 이 부사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매일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한 해 코스피지수가 40% 넘게 떨어지는 동안 10년투자 펀드도 수익률 -37%를 기록했다. 그는 "밖에선 다른 펀드들에 비해 선방한다고 했지만, 결국 고객에게 손실을 끼친 것 아니냐"고 했다.
그때 손을 잡아준 이도 고객이었다. 힘들어하던 이 부사장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울 지경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가자 펀드 고객들이 격려 전화는 물론 '우린 괜찮으니 담배 피우지 마시라'는 편지까지 보내왔다.
그로부터 3년 뒤 2011년 유럽 위기로 코스피지수가 10% 넘게 떨어질 때도 10년투자 펀드는 1.3% 수익을 냈다.
이 부사장은 지난 10년간 가장 애태운 종목으로 한국전력을 꼽았다. 8년 가까이 주가가 제자리를 맴돌다 1년 만에 2배로 뛰어 수익을 거뒀기 때문이다. 또 "2006년부터 연평균 10% 이상 꾸준히 10년간 벌어준 동아타이어가 우리 펀드와 닮아 가장 애착이 가는 종목"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가치투자가 정답은 아니다"라고 했다. 대체로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투자법이며, 기다린다고 꼭 수익을 거두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고스톱으로 몇 천원만 잃어도 밤잠 설치는 소심한 성격의 투자자들에겐 가치투자가 최고의 투자법"이라고 했다. 그에게 가치주란 '싸고, 소외되고, 귀한 종목'이다. 이 부사장은 "기업의 자산 가치, 영업이익과 배당, 성장성을 포함한 내재 가치가 시가총액보다 높은 종목을 주시하고, 투자 후엔 마음속에 9층 석탑을 쌓듯 최소 3년은 지켜보라"고 했다. "독보적 기술을 가진 1등 기업, 꾸준히 이익을 올리고 배당을 많이 주는 기업, 대주주가 지분이 많은데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 기업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그는 다음 목표에 대해 "고객 모두에게 금리의 2배 수익률을 꾸준히 안겨주는 펀드를 만드는 것, 그게 전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