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나주 영산포 홍어 1번지의 코스 요리"
"푸아그라 보다 부드러운 홍어 애, 강도 높은 홍어 튀김도 별미"
꽃 피는 봄엔 유난히 일교차가 크다. 드센 바람도 한몫을 한다. 옷을 한 겹 더 입자니 덥고, 벗자니 영 춥다. 기온의 차이는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바람난 열아홉 가시내마냥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느닷없는 여행은 버스보다 기차가 더 운치 있다. 그래도 뚜렷한 행선지 없이 길을 나서기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모양이다. 핑계를 찾게 된다. 속이 헛헛해 조금 이르게 보양식을 찾는다고 해두자. 머릿속에서 대동미(味)지도를 풀 스캔한다. 뚜두두둣뚜…… 내 귀에만 들리겠지. 아무렴 어떻겠는가, 난 한식경(30분)뒤면 열차에 있을 몸인데.
3월의 미식 기행은 남도가 정답이다. 그 중에서도 나주 땅은 압권이다. 펄펄 끓는 가마솥의 곰탕도 좋고, 항아리 속 쿰쿰한 홍어도 좋다. 어라! 희한한 일일세. 갑자기 모니터에서 냄새가 난다. 코를 가까이 대보니 삭힌 홍어 향이 가득이다. 멈추질 않는다. 이를 어쩐다. 그래 결정했어. 오늘은 영산포 홍어 1번지다.
아삭거리게 얼려서 썰어낸 홍어 애를 기름장에 찍어 혀 위에 올리면 정확히 3초 후에 녹아내리기 시작하는데 혀를 지그시 입천장으로 올리면 푸아그라가 안 부럽다. 곁들여 내오는 홍어 껍질을 오물거리며 한 마디 내뱉는다. ‘누가 그럽디까? 민어 껍질이 갑이라고? 아직 제대로 된 홍어 껍질을 못 드셔 보셔서 하는 소립니다.’
이어지는 친구도 반갑다. 싸구려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나는, 다이어트 해서 삐쩍 마른 홍어가 아니라 갈비살, 지느러미살 등에서 자르고 남은 두툼한 속살로 새콤달콤매콤하게 무쳐내는 홍어무침. “아주머니,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주쇼~” 포슬포슬 무너지는 살결이 솜사탕 같다.
드디어… 드디어 삼합 차례다. 미적 감각이 떨어지다 보니 정확히 홍어의 색깔을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암갈색? 흑적색? 암튼 명인이 직접 삭힌 국내산 흑산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 양이 적어 더 간절한 코와 홍어 거시기가 한 접시에 담겨 있다.
홍어 삼합의 미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명인이 개발한 것이 바로 김. 앞 접시에 김을 깔고 초장에 무친 홍어를 올리고 묵은지와 돼지고기를 차례로 쌓아 (점장이 가르쳐 주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나만의 레시피) 젓가락으로 만다. 입에 넣고 씹으면 김이 폭 찢어지며 홍어가 쏟아져 내리고 뒤를 이어 시큼한 묵은지와 기름진 돼지고기가 입안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아~ 그냥 취직 시켜달라고 할까? 여기까지는 흉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명인의 홍어 코스가 빛나는 건 선수 배치에 있다.
4번 타자는 홍어튀김. 괜히 4번이겠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튀김을 반으로 깨물고 내용물을 확인(한국인의 식습성)하는데… 헉! 한 방 맞았다. 메가톤급 홍어 폭탄이요 발효의 절정이다. 코를 지나 머리끝까지 쏜다. 강약중강약 슬로우 슬로우 퀵퀵. 무도회장에서 제비의 손에 몸을 내던진 꼴이다. 안국현 명인이 깔아 놓은 롤러코스터 안에서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긴장이 풀린다. 튀김의 아이디어와 코스의 배치는 그가 왜 명인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할 수밖에 없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5번 타자의 매력은 한 방이 있건 없건 자기 색깔이 정확해야 한다. 그래야만 팀의 타순이 엉키지 않는다. 홍어1번지의 5번 타자는 전. 4번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표출한다. 택배로라도 받고 싶은 맛이다. 다음은 넉넉한 찜. 홍어 특유의 질감을 느끼는데 이만한 녀석이 또 있을까? 데친 콩나물에 돌돌 말아 매끄러움과 아삭함을 동시에 감상한다.
슬슬 자리 깔고 눕고 싶어지는데 끝내기 선수가 타석에 오른다. 별미 중의 별미. 홍어 요리의 백미. 홍어애국! 이 매력에 중독되면 마지막 남은 초가삼간도 팔아치운다는 그 무서운 국 뚝배기. 밥을 말아 반 죽의 형태가 된 홍어애국을 목으로 넘긴다. 아~~~ 세 아들 녀석 중 한 놈은 꼭 홍어집으로 장가보내고 말리라.
◆ 김유진 김유진제작소 대표는 올해로 21년째 음식 관련 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13년 동안 컨설팅을 통해 성공시킨 레스토랑이 200곳을 넘고, 국립중앙박물관 식음료 총괄 컨설턴트를 맡았다. MBC프로덕션 PD로 일하던 그는 순전히 ‘맛’ 때문에 피디 생활을 마치고 요식업계에 뛰어들었다. 맛있는 요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100시간 내로 맛을 보고야 만다. 울릉도 옆 죽도에서 출발해 동해, 남해, 서해를 거쳐 백령도까지 44개의 섬을 취재하고 대박의 비결까지 섭렵한 대한민국 유일한 칼럼니스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뭘 먹을까?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하루를 보낼까만 연구한다.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 고민하고 점심 먹으면서 저녁 고민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식탐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