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스타트업 삼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조직 문화 쇄신에 나선다. 관료주의를 없애고 결재 단계도 줄여 스타트업처럼 빠르게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인사 혁신도 예고했다. 삼성전자는 대리, 과장, 부장에 이르는 직급 체계를 단순화하는 것부터 인터넷 기업 카카오처럼 직급을 떼고 이름만 부르는 문화, 연한에 관계없이 능력만 있으면 발탁 인사를 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삼성전자에 정통한 인사들은 삼성전자가 ‘위기론'을 설파하며 조직 분위기를 쇄신해오던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일단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목표관리, 성과관리 등 정교한 툴로 회사를 운영해 온 ‘관리의 삼성'이 스타트업 문화를 뿌리 내릴려면 시간이 걸리고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의견도 많이 나온다.

◆ 실용 강조하는 이재용 부회장, 틈날 때마다 “실리콘밸리처럼”

삼성전자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2008년부터 약 8년간 이어온 서초동 시대를 마감하고 수원 시대를 여는 것에 발맞춰 조직 문화 쇄신을 준비해 왔으며 새 조직 문화의 핵심 키워드를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로 정리했다.

24일 '스타트업 삼성 컬처 혁신' 행사에 참석한 사업부장들이 스타트업 삼성 컬처혁신을 약속하는 선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현석 사장(VD사업부장), 서병삼 부사장(생활가전사업부장), 김기호 부사장(프린팅솔루션사업부장), 전동수 사장(의료기기사업부장), 김영기 사장(네트워크사업부장).

이번 기업 문화와 인사 쇄신 방안에는 격식을 거부하고 실용을 챙기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스타일이 반영됐다는 게 중론이다. 이 부회장은 실리콘밸리 기업처럼 기술력 있는 기업을 인수하는 데 적극적이고 삼성전자 실리콘밸리 법인 사무실의 별도 임원 공간을 없앴다. 일사불란한 삼성그룹 문화의 핵심 행사인 대졸 신입 사원 하계 수련 대회도 폐지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삼성전자 수뇌부도 올해초부터 달라진 멘트를 내놓고 있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올해 시무식을 실질적인 본사 기능을 해 온 서초 사옥이 아니라 서울 R&D 캠퍼스(서울 서초고 우면동 소재)에서 열고 “O2O와 공유경제 등 혁신 사업모델이 (삼성전자의 강점인) 하드웨어의 가치를 약화시키고 소프트웨어와 플랫폼으로 경쟁의 판을 바꾸고 있다”며 “새로운 경쟁의 판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과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앞이 보이지 않는 삼성...대외환경 위기론에서 창의부족론으로 바뀌어

삼성전자에 다니는 직원들은 입모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입사한 후 회사가 한번도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항상 위기론을 강조하고 역대 부회장들도 삼성전자는 초일류로 가느냐 추락하느냐 중대 기로에 있다면서 위기 의식을 설파해왔다.

지금의 삼성전자는 그 어느 때보다 위기에 처했다. 황금알을 낳던 스마트폰 시장 규모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액정디스플레이(LCD)와 메모리 반도체, 가전분야는 중국업체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대만의 TSMC에 물량을 뺏기면서 이익 감소가 예고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바이오와 전장 부품을 미래 먹거리로 내세웠지만, 뚜렷한 실적을 낼 때까지는 더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신발끈을 다시 맨다고 해서 삼성전자가 부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주변환경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혁신 제품이 나오지 않는 기업 문화를 개선하지 않고 ‘패스트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새 시장을 만들 수도, 중국업체의 거센 추격을 따돌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크레이티브랩(C랩)’이라는 삼성전자 사내 벤처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그동안 조직이 너무 크다 보니까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삼성전자가 조금이라도 창의적인 문화를 만들어보려고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C랩부터 모자이크까지 경험 쌓은 삼성전자...회의적 목소리 극복하고 임원부터 바뀌는 것이 관건

삼성전자는 2012년 창의개발연구소를 신설하며 직원들의 창의성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개발한 제품은 장애인용 안구마우스, 시각장애인용 자전거 등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제품들이었다.

삼성전자는 이를 사업부별로 확장하기 위해서 ‘C랩’이라는 사내 벤처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C랩은 임직원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만약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통한다고 판단되면 창업 지원까지 해준다. 현재까지 C랩에서 출발해 삼성전자에서 독립해 스타트업이 된 사례도 있다.

삼성전자는 2015년부터 도입한 집단지성 시스템 ‘모자이크(MOSAIC)’를 선보였다. 모자이크에는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코너, 사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코너, 임직원간의 온오프라인 모임을 지원하는 코너 등이 있다. 삼성전자는 6월 내놓을 인사혁신제도도 모자이크에서 나온 의견을 많이 참조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한 '글로벌 인사제도 혁신'을 주제로 온라인 대토론회에는 2만6000여명의 임직원이 참여했으며, 1만200여건의 제안과 댓글이 달렸다.

삼성전자의 한 직원은 “직원이 C랩 프로젝트에 참가하겠다고 하면 인사 평가를 박하게 주는 부서장들이 있다”며 “임원들의 눈에는 C랩이 노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직원은 이어 “빨리 성과를 보여줘야한다는 압박도 계속된다면 프로그램 자체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또다른 삼성전자 관계자는 “예전에도 7시에 출근해 4시에 퇴근하는 제도를 신설했지만, 오히려 7시에 출근해 11시까지 일해 ‘세븐 일레븐’이라는 신조어가 사내에 돌았다"면서 “삼성전자 다지인과 연구개발 인력을 위주로 자율출퇴근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실제 얼마나 활용하는 지 보라"고 말했다.

특히, 고위직 임원부터 바뀌지 않는 한 삼성전자의 이런 노력이 결실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는 반응이 많다. 삼성전자 또다른 직원은 “보고와 관리를 최우선 가치로 여겨온 경영진을 비롯한 임원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라면서 “톱 레벨에서 바뀌지 않는다면 회사의 이런저런 노력도 모래성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