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이 글로벌 해운업 침체에 따른 경영 악화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21일 채권단(채권 금융회사들)에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300억원대의 사재(私財)를 출연하고, 주요 계열사인 현대증권 매각까지 추진 중이지만, 결국 좌초 위기에 몰렸다.
자율협약은 채권단이 공동으로 회사의 재무구조 개선 작업을 추진한다는 점에서는 기업구조촉진법에 따른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과 같지만, 법적인 근거가 없어 부실기업과 채권단 간 일종의 신사협약이라고 볼 수 있다. 저강도 워크아웃이라고도 불린다. 자율협약에 들어가면 채권단은 원금과 이자 상환을 3개월간 유예하고, 출자전환을 포함한 채무 재조정 방안을 수립하게 된다. 주채권 은행인 산업은행 관계자는 "현대그룹이 현대증권 매각 등으로 자금을 마련하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한진해운과 함께 국내에 2개뿐인 컨테이너 선사라는 점 등을 고려해서 일단 자율협약이라도 추진해서 출자전환 등의 방안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산업은행 등 채권 금융회사들이 29일까지 전원 동의해야만 자율협약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경영 정상화 전망은 밝은 편이 아니다. 현대상선은 지난 2011년 유럽 재정위기로 글로벌 물동량이 급감하면서 2011년 3574억원 적자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5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총 4조7000억원의 빚더미 가운데 산업은행 등 채권 금융회사로부터 빌린 돈은 1조8000억원이고, 나머지는 회사채 등을 발행해서 조달한 빚이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에 진 채무는 자율협약으로 일단 시간을 벌 수 있지만, 사모펀드나 개인 투자자 등이 회사채 상환을 요구할 경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실제로 현대상선은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현대그룹 본사에서 열린 사채권자 집회에서 다음 달 7일 만기가 돌아오는 1200억원의 무보증 사채 만기일을 3개월 연장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참석한 채권자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지 못해 만기 연장이 무산됐다.
주채권 은행인 산업은행이 “이대로 더 버틸 수는 없다. 자율협약을 통해 채권 금융회사들만의 지원이라도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러나 산은이 “추가 지원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바꿔서 현대상선에 대한 자율협약을 시도하는 것은 더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진행할 경우 회생의 기회가 남아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산은이 채권단을 설득해 모두 자율협약에 동의하도록 하면 일단 채권단이 이자 유예 등 채무 조정을 해주게 된다. 출자전환 등 지원 방안도 추진돼 한숨 돌리게 된다. 변수는 회사채 등을 산 일반 채권자들의 상환 요구다. 상환 요구가 쏟아질 경우 경영 정상화는 어려울 수도 있다.
현대상선에 대한 자율협약 성립 여부는 용선료(선박 이용료) 재협상에 달려있다는 것이 산은의 입장이다. 현대상선은 해운업 호황기에 맺은 고가(高價) 용선료 계약으로 현재 연간 수조원대의 용선료를 지출하고 있다. 현대상선이 하루 5만달러에 계약한 컨테이너선 용선료가 현재는 8000달러 선으로 내려간 상태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이달 초 끝난 유럽·일본 선주(船主)들과의 1차 용선료 협상에서 우리가 용선료 인하를 요청했는데, 최근 2차 협상을 하자는 연락이 몇 군데에서 들어오고 있다”며 “긍정적인 신호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