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巨人)의 퇴장'이 시작됐다. '거인'이라는 말을 유난히 좋아해 야구단 이름도 '롯데 자이언츠(Giants·거인들)'로 지은 신격호(94)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49년 만에 한국 롯데그룹의 모태(母胎)인 롯데제과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일본에서 제과(製菓) 사업을 일으킨 신 총괄회장은 1967년 4월 롯데제과를 세우면서 한국 투자를 시작했다. 그는 '한강의 기적'을 만든 재계 1세대 창업자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생존자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처럼 사랑받는 기업을 만들겠다"며 회사 이름을 '롯데'로 짓고 한국 재계 5위로 키워온 신 총괄회장이 롯데와 이별하고 있는 것이다.

롯데제과는 7일 "신 총괄회장의 등기이사 사임과 황각규 그룹 정책본부 사장의 이사 선임을 이달 25일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이사회에서 결의했다"고 밝혔다. 롯데그룹은 "신 총괄회장은 고령(高齡)으로 인해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돼 임기 만료에 따라 재선임하지 않기로 했다"며 "이사회에 의한 준법 경영을 확립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지난달 3일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에서 열린 ‘성년 후견 개시 심판 청구’ 첫 심리를 마친 뒤 휠체어를 탄 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신 총괄회장은 이달 21일과 28일 임기가 끝나는 롯데제과·호텔롯데와 함께 부산롯데호텔·롯데쇼핑·롯데건설·롯데자이언츠·롯데알미늄 등 모두 7개 계열사의 등기이사를 맡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향후 신 총괄회장의 임기가 만료될 때마다 재선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지난 6일 일본롯데홀딩스 임시 주주총회에서 승리를 거둔 신동빈 회장의 입지가 한층 공고화되고, '아버지의 뜻'을 앞세운 신동주 회장의 영향력은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 총괄회장의 등기이사직을 이어받는 황 사장은 신동빈 회장이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상무로 그룹 경영에 본격 뛰어든 1990년부터 신 회장을 보필해온 핵심 측근이다.

'신격호 시대'의 종언… 신동빈 체제 공고화

한 롯데 고위 관계자는 "창업주를 물러나게 한다는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 총괄회장 정신 건강 상태가 괜찮으냐'는 투자자 문의가 잇따라 내린 고육책(苦肉策)"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신동주 회장이 신 총괄회장을 악용하고 있다"고 판단한 롯데 측의 '결단'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신 총괄회장은 이달 9일 성년후견인 지정 여부에 대한 서울가정법원의 2차 심리를 앞두고 있다.

롯데제과는 롯데칠성·롯데푸드·롯데리아 등 식음료 계열사 지분을 많이 갖고 있어 그룹 내 중간 지주회사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2월에는 일본의 ㈜롯데가 롯데제과 주식을 사들이며 신동빈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롯데제과는 이번 주총에 주식 액면가를 5000원에서 500원으로 분할하는 안건도 상정한다. 롯데제과 관계자는 "240만원이 넘는 주가를 낮춰 국내 투자자들이 주식을 많이 보유하도록 해 롯데가 한국 기업이 되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신동빈, "광윤사 신동주 대표 선임 취소해 달라"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신동빈 회장의 자신감이 깔려 있다. 그는 지난 6일 일본롯데홀딩스 임시 주총을 앞두고 그룹 임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달 25일 롯데제과 주총에서 신 총괄회장 등기이사 사임 건을 놓고 표 대결이 벌어져도, 우호 지분 49.5%를 확보하고 있어 지분 10.8%를 확보한 신 총괄회장과 신동주 회장 측에 이길 것으로 전망된다.

신동빈 회장은 올 1월 말 일본 광윤사를 상대로 "작년 10월 임시 주총에서 나를 이사에서 해임하고 신동주 회장을 새 대표로 선임한 결의는 무효"라는 소송을 일본 법원에 낸 것으로 7일 확인됐다. 광윤사는 한·일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일본롯데홀딩스 지분 28.1%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50%+1주'의 지분을 갖고 있는 신동주 회장이 경영권 분쟁을 벌이는 토대에 해당하는 회사다.

롯데그룹은 "당시 신동주 회장의 지분 획득과 대표 선임이 서면 제출된 신 총괄회장의 뜻을 바탕으로 진행된 만큼, 그의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대표 선임의 효력도 없다는 것"이라고 소송 취지를 밝혔다. 이번 소송에서 신동빈 회장이 승리하면 신동주 회장은 광윤사 최대주주 지위를 잃어 경영권 분쟁을 이끌 동력이 현격하게 떨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