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재산 불리기,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다음 달 14일 도입되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일명 '만능통장' 제도가 산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제도 시행을 목전에 두고 증권회사의 고유 업무 영역인 '투자일임업'을 은행에도 허용해준 것이 논란이다.

투자일임업이란 금융회사가 투자자로부터 얼마의 돈을 어디에 얼마의 비중으로 투자할지 대신 결정하고 관리해주는 금융업으로, 지금까지 증권사·자산운용사·투자자문사 등에만 허용했다. 증권사의 랩어카운트(wrap account)가 대표적인 일임 상품이다. 그간 은행은 이런 업무를 할 수 없었지만, 금융위원회가 ISA에 한해 은행에도 이 기능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투자자의 선택권을 넓혀주자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파이를 은행과 나눠 먹게 된 증권업계의 반발보다, 전문적인 투자일임 경험이 없는 은행에 투자를 맡겼을 때 투자자들의 재산 불리기라는 소기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될 수 있을지가 근본적으로 우려스럽다고 보고 있다. 주가연계증권(ELS)을 원금보장 상품과 다름없는 상품인 것처럼 팔아치운 일부 은행의 판매 습성이 ISA에도 재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논란의 만능통장

ISA는 투자자 1명이 금융회사 중 단 한 곳에 1개 계좌만 만들 수 있다. 이 계좌에 연간 2000만원 한도로 예금이나 적금, 펀드, 리츠(REITs), 주가연계증권(ELS) 등 다양한 상품을 골라 담아 5년 뒤 상품의 손익을 모두 따져 순이익 200만원까지 세금을 물리지 않는 구조다. 올해만 약 800만 계좌, 24조원가량의 신규 자금이 ISA에 흘러들 것으로 금융투자협회는 예상한다.

투자자는 스스로 어떤 상품에 얼마를 투자할지 결정하거나(신탁형 ISA), 그럴 자신이 없다면 믿을 만한 금융회사에 찾아가 본인의 투자 성향을 상담한 뒤 해당 회사가 추천하는 '모델 포트폴리오'에 따라 투자할 수도 있다(일임형 ISA). 상당수 투자자는 금융회사에 투자 결정을 맡기는 일임형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은행 지점이 7300여개, 증권사 지점은 1200여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은행이 일임형 ISA 고객을 대거 유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은행이 이 업무를 제대로 하도록 적어도 분기마다 한 번씩 고객의 자산 배분을 재조정하는 내부 시스템을 만들 것을 권고하기로 했다.

문제는 은행이 예금만기 고객에게 ELS를 마구 팔아댔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지금도 증권사와 관련해 접수되는 금융분쟁조정 항목 중 일임 상품과 관련된 것이 1·2위를 다툰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은행은 원금이 보장되는 가장 안전한 금융기관이라는 것이 국민 인식인데, 투자일임업은 다르다"며 "원금 손실이 발생했을 때 운용 전문가가 없는 은행은 고객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은행원들의 업무 실적을 계량화한 평가 지표인 'KPI(핵심성과지표)'에 특정 상품이 포함되면 목숨을 걸고 팔아치우는 성향이 자칫 제대로 된 고객 자산관리를 그르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시각도 있다.

은행권, 자동차 경품까지 내걸었지만 ISA 판매 준비는 부실

금융시장의 이런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은행들은 새 사냥감을 놓고 대대적인 마케팅 전쟁을 벌일 태세다. 자금력과 조직력이 증권사보다 우위에 있는 은행권은 200만원 상당의 골드바(NH농협은행), 하와이 여행권(우리은행), 자동차 경품(신한은행·한국SC은행)까지 내걸고 나섰다. 하지만 고위험 투자 상품을 판매할 준비 상태는 매우 부실한 상태다. 16일 은행 업계에 따르면 일임형 ISA와 관련한 조직이 확정된 은행이 아직 한 곳도 없다. 신한은행은 일임형 ISA를 운용할 부서와 인력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국민은행 역시 일임형 ISA를 신탁부와 자산관리부 중 어느 부서가 맡는 게 나을지 가늠 중이다. 하나금융투자를 계열사로 둔 KEB하나은행은 랩어카운트 운용 경험이 많은 증권사에서 관련 인력을 충원하는 방법까지 고려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은행들이 3월까지 일임형 ISA 판매업 허가는 받겠지만 3월 중에 관련 상품을 내놓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ISA 제도 설계에 참가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오윤 교수는 "결국 ISA는 수익이 생겨야 고객이 세제 혜택을 볼 수 있는 제도로, 금융회사가 투자를 잘하는 게 관건"이라며 금융회사들의 실적 싸움에 투자자의 재산이 '동원'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