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사당동에서 이른바 '반(半) 전세'를 사는 회사원 허모(41)씨는 이달 초 은행에서 8000만원을 빌려 인근에 집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집주인이 월세 20만원 인상을 요구하자, 차라리 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씨는 요즘 결심이 흔들리고 있다. 그는 "아내가 금리도 오르고 미분양도 많은데 좀 기다려 보자고 한다"며 "지금 내는 월세 40만원도 벅찬데 20만원을 더 올려주기도 어려워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주택담보대출의 거치기간을 1년 이내로 규제하는 금융당국의 새로운 대출 제도 시행일(2월 1일)이 다가오면서 주택 시장이 움츠러들고 있다. 부동산소비심리지수 등 부동산 경기를 보여주는 3대 지수가 일제히 떨어지고 있다. 일부 건설사들은 아파트 분양 시기를 연기하고 있다. 당초 이달 중순 지방에서 500여 가구를 분양하려던 A사는 이달 말로 한 차례 연기했다가 다음 달 설 이후로 또다시 늦췄다. A사 관계자는 "작년 가을만 해도 건설사들이 시장 분위기가 좋아 한겨울에도 분양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지금은 분위기가 바뀌어 어쩔 수 없이 시기 조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공급자·가격 등 3대 지수 하락
대출 규제 시행을 앞두고 위축된 주택 시장 심리는 소비자·공급자·가격 등 부동산 관련 3대 지수에 일제히 반영됐다. 국토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전국 부동산시장 소비심리지수'는 지난해 11월 121.6에서 12월 107.9로 13.7포인트 떨어졌다. 소비심리지수 95~115는 부동산 경기가 보합세를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 115~200은 상승 국면으로 분류한다.
건설사들이 향후 주택경기를 바라보는 '주택사업환경지수'도 지난달보다 13.1포인트 하락한 52.6을 기록했다. 두 달 연속 기준선인 100을 밑돌았다. 주택산업연구원이 조사하는 이 지수는 100이 넘으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건설사들이 나빠질 것이라고 보는 업체보다 많다는 뜻이다. 가격 지수에도 시장의 불안감이 반영됐다. 한국감정원이 발표하는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변동률은 작년 내내 강세를 보였지만, 지난달 마지막 주부터 3주째 '0%'를 기록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비자, 공급자, 가격지수 모두 상승세가 꺾였다는 점에서 분위기가 위축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대출규제, 상환기간 길게 하면 부담 줄어
주택시장의 3대 지수가 일제히 하락한 것은 주택담보대출 규제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의미다. 지난달 14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대출규제의 핵심은 원금을 갚지 않는 거치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주택구입을 위한 신규 담보대출은 거치기간이 현행 3~5년에서 1년 이내로 줄어든다. 수도권은 2월 1일부터, 지방은 5월 2일부터 각각 시행된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주택을 구입하는 소비자 입장에선 초기부터 대출 상환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새 대출 규제가 시행돼도 실수요자라면 '감당할 만한 수준'에서 조정이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우선 새 아파트를 분양받을 때 받는 집단대출의 경우 새 규제가 적용되지 않아 영향을 덜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기존 주택구입을 위한 대출이라도 상환기간을 길게 잡으면 부담이 줄어든다. 예를 들어 1억원을 연 3.1% 금리로 빌릴 경우 지금처럼 이자만 갚는다면 매달 25만8000원 정도를 내면 된다. 원금을 함께 상환할 경우 상환기간을 10년으로 잡으면 원금과 이자를 매달 97만원쯤 내야 해 부담이 크다. 하지만 30년 장기대출로 받으면 원리금 상환액이 42만7000원으로 다소 줄어든다. 이남수 신한은행 부동산팀장은 "실수요자라면 장기상환으로 대출받아 조금씩 갚는 게 가계 건전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대출 규제 있어도 급랭은 없을 듯"
전문가들은 대출 규제가 시행된다고 해도 당장 시장이 급랭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올해도 저금리와 전세난이 지속되면서 내 집 마련 잠재 수요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대외 경제 변수와 계절적 영향으로 등락은 있겠지만 올해 상반기까지는 주택 시장이 불안한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함영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발표되는 시장 지표의 악화는 계절적인 비수기가 반영된 측면도 크다”며 “다음 달 설 연휴가 지나고 봄 성수기가 찾아오면 분위기가 다소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규 분양 시장의 경우 지난해처럼 ‘묻지마 청약’ 열풍이 불기는 어렵다. 지역이나 입지에 따라 차별화 현상이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주택경기가 다소 위축됐지만, 실제 작년 12월 이후 분양한 경기 광명, 위례신도시 등 인기 지역 아파트는 완판(完販)에 성공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주택 구입 심리가 위축되긴 하겠지만 소위 ‘거래 절벽’이나 가격 급락보다는 상승세가 둔화되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