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홍콩계 사모투자펀드(PEF) 어피니티가 우리나라 엔터테인먼트 업체 로엔을 카카오에 1조8700억원에 팔면서 투자 기간 2년6개월 만에 1조2000억원의 차익을 챙겼다. 어피니티는 2014년엔 글로벌 3위 사모펀드 KKR과 손잡고 산 오비맥주를 5년 만에 세계 1위 맥주 회사 AB인베브에 되팔아 공동으로 4조원 넘는 이익을 남겼다. 어피니티는 글로벌 순위론 60위권이지만 아시아에선 인수·합병(M&A)의 강자로 평가받는다.

작년 9월엔 글로벌 40위권의 홍콩계 사모펀드 RRJ캐피털이 45억달러(약 5조4700억원)의 자금을 모았다. 아시아에서 단일 사모펀드 규모론 'KKR 아시안 펀드(60억달러)'에 이어 단숨에 2위로 등극했다. 2011년 창업한 RRJ는 업력이 짧지만 연 15~25%의 수익률을 돌려준다는 말이 글로벌 연기금 사이에서 돌아 돈이 몰렸다고 한다. 같은 달 우리나라 사모펀드 MBK가 글로벌 1, 3위 사모펀드인 칼라일과 KKR을 제치고 우리나라 최대이자 아·태 지역 최대 M&A 딜(거래)이었던 홈플러스 인수전에서 승리한 것도 아시아 토종 사모펀드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알려줬다.

아시아에서 토종 사모 투자 펀드들이 약진하고 있다. 글로벌 PEF 시장은 칼라일, TPG, KKR, 블랙스톤 등 4대 미국계 펀드가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는 이들 글로벌 강자의 틈새에서 토종 PEF들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아시아 PEF들은 지역 사정에 능통하다는 이점을 살리는 한편 구조조정만 강조하고 '기업 사냥꾼' 이미지가 강한 서구형 PEF와 달리 지역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기업 가치를 올리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어피니티, MBK 등은 자금 동원력이 막강한 대형 글로벌 사모펀드가 아니더라도 지역에 특화한 중소형 사모펀드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글로벌 사모펀드에서 M&A 기법 배워 토착화

아시아 토종 PEF를 주도하는 금융인들은 대형 글로벌 투자은행(IB)이나 사모펀드에서 인수·합병(M&A) 기법을 배운 후 독립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MBK의 김병주 회장은 골드만삭스 출신으로 2000년 칼라일에서 한미은행 인수를 주도했다. 2005년 칼라일에서 독립, 15억달러 규모의 'MBK 1호 펀드'를 출범시켰다. 당시 싱가포르 국부 펀드 테마섹의 최고경영자(CEO) 호칭 여사가 "아시아를 위해 일해 달라"며 5억달러를 쾌척했다. 김병주 회장은 기업 인수 후에 인력을 최대한 유지하는 등 아시아적 가치를 중시하는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어피니티는 말레이시아 출신의 KY 탕 회장이 2004년 스위스 투자은행 UBS의 사모펀드 팀을 독립시켜 홍콩에서 설립했다. 출범 초기에는 탕 회장이 주도했으나 한국 기업들의 M&A에서 성과를 내면서 최근엔 홍콩·한국 연합팀 같은 모양새다. UBS에서 같이 일하다 초기부터 합류한 박영택 회장이 하이마트, 페이스샵 등의 거래를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회사 내 한국 팀의 위상이 높아졌다. 업계 관계자는 "어피니티는 1위 기업에 투자해 1위 자리를 공고히 하거나 2위 기업에 투자한 후 1위로 키워서 파는 전략을 쓴다"고 말했다.

RRJ, BPEA, CDH 등 홍콩을 주무대로 하는 아시아 PEF들은 중국에 중점 투자하기 때문에 한국에선 이름이 생소하다. RRJ는 골드만삭스 출신의 리처드 옹이 설립했고, BPEA는 영국 베어링스 출신들이 뭉쳐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선 한국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PEF도 등장했다. 2005년 리먼 브러더스 출신의 이재우, 모건스탠리 출신의 신재하, 관료 출신의 변양호가 공동으로 세운 보고펀드와 2010년 모건스탠리 출신의 한상원이 세운 한앤컴퍼니 등이 대표적이다.

투자 회수 어려움 겪기도… 錢主는 서구 자금이 많아

토종 PEF들이 활발히 움직이면서 아·태 지역의 PEF 거래 규모는 2013년 500억달러에서 작년 1330억달러(약 160조원)로 급증했다. 하지만 토종 PEF들은 회사를 사는 데는 수완이 좋지만 파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아시아에선 아직 기업을 사고파는 데 인색한데, 토종 펀드들도 이를 쉽게 깨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MBK의 경우 국내에서 케이블 네트워크 씨앤엠을 인수한 지 7년이 넘어가면서 아시아에서 글로벌 PEF의 평균 투자 기간인 4.7년을 훌쩍 넘었다. 중국 기업에 투자했던 PEF들은 2012~2013년 중국의 신규 상장 시장이 위축되면서 자금 회수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대부분 2000년대 중반에 출범한 아시아 토종 PEF들은 펀드가 막 성장해야 될 시기인 2008년에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맞으면서 타격을 받기도 했다.

기존 글로벌 PEF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토종 PEF들의 전주(錢主)로도 서구 자금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순수 토종 펀드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MBK는 종잣돈을 테마섹에서 마련하기는 했지만, 캐나다연금의 자금이 많이 들어와 있다. 어피니티는 미국·중동 등 전 세계 연기금에서 투자금을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RRJ가 자금을 모집할 때는 북미계 자금이 몰려 왔다고 한다. 이재우 보고펀드 대표는 "아시아 사모펀드들이 서구 사모펀드와 달리 인수 회사의 경영진·인력을 유지하면서도 기업 가치를 올리는 투자 모델을 만드는 것은 긍정적"이라면서도 "국민연금 등 아시아 연기금들이 적극적으로 모험자본에 투자하는 문화가 생겨야 아시아의 돈을 아시아 토종 사모펀드들이 벌어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