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 단위를 100만원으로 올리겠습니다. …1700, 감사합니다. 1800? 1800 받으시겠습니까? 네, 1800. 전화로 1900. 현장에 2000, 2000 있으십니까? 네, 감사합니다. 2100 있으십니까? 없으시면 2000에 낙찰됩니다. 2000? 2000만원.” “땅!”
“단원 김홍도의 ‘서과도’와 ‘숭채도’입니다. 시작가 2500만원입니다. 2500, 2500, 없으십니까?” “땅!”
경매는 우아하지 않다. 진행하는 이나 참가하는 이나, 숨이 가쁘고 생각할 틈도 없다.
‘경매사’는 서면으로 미리 써낸 가격과 전화 응찰자의 입찰 가격을 확인하면서 현장 가격을 띄운다. 가격을 받겠다며(호가를 더 높인 가격으로 응찰하는 것) 손에 쥔 패들(paddle·경매 참가 번호가 써 있는 팻말)을 들어 올린 참가자를 놓쳤다간, 거센 항의가 튀어나온다. 흐름을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속도감 있고 매끄럽게 진행해야 응찰자들 사이에 경쟁이 붙고 가격이 올라간다.
‘참가자’들은 미리 점찍어둔 물품의 경매 번호가 다가오면 바짝 긴장한다. 머릿속으로 예산을 따져본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노리는 이가 또 없을까. 순식간에 가격이 뛴다. 접을까 말까 고민할 새도 없다. “땅!” 경매사가 낙찰을 알리는 망치를 치면 그제야 잠시 긴장을 푼다. 경매업체 직원이 인수자 서명을 받으러 다가온다. 미리 생각해둔 가격을 뛰어넘은 작품은 포기한다. 가격을 한 번 더 올리면 낙찰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은 불과 몇 초다.
2016년 새해 첫 경매는 고미술품 전문 경매업체인 아이옥션이 12일 진행한 제23회 장터경매다. ‘장터경매’엔 메인 경매보다 저렴한 물품들이 출품된다. 도자기, 민속품, 고서화 등 290점에 대한 경매가 150분 만에 끝났다. 물품 한 점당 2분 남짓한 시간을 할애한 셈이다. 낙찰률은 77%, 총 낙찰액은 2억3715만원을 기록했다. 시간당 억 단위로 돈이 움직였다.
올 들어 처음으로 열린 경매인 덕에 수집가들의 시선을 끌었다. 남은 의자가 없어 십여명은 맨 뒤에 선 채로 경매에 참여할 정도였다. 체크 무늬 헌팅캡을 쓴 백발 신사, 짙은 남색 베레모를 쓴 노신사…. 간혹 보이는 중년 응찰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한 수집가들이다. 여성 응찰자는 열 명 중 한 명꼴도 안 됐다.
장터경매답게 투자자보다 ‘실속파’ 수집가들이 주를 이뤘다. 최고가는 2500만원에 낙찰된 서양화가 오지호의 ‘아리아스 데생’. 경합 없이 시작가에 팔렸다. 시작가 100만원에 출품된 백범 김구의 현판은 현장 응찰자가 없어, 서면으로 미리 응찰한 수집가에게 돌아갔다.
수천만원짜리 고서나 그림보다는 수십만원에 구입할 수 있는 도자기나 작은 가구, 조각상 같은 물품의 인기가 많았다. 도자기류의 낙찰률은 90%를 웃돌았다. 조선시대 백자청화 ‘만수무강’ 명문발은 2000만원에 낙찰됐다. 곱돌(활석)을 음각해 만든 ‘화훼문찰각화로’를 둘러싼 경합도 치열했다. 30만원에 출품된 화로의 가격이 10배인 300만원까지 뛰었다. 낙찰을 알리는 망치 소리와 함께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반면 경매 시작 가격이 수천만원대인 물품들은 대부분 유찰됐다. ‘시작가 별도문의’라고 적힌 대한제국 황실 금(金)제 회중시계 한 쌍과 작자 미상인 청나라 종친회 가계도가 그랬다. 경매사가 “시작가는 4억원입니다”라고 알렸지만, 패들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예가 한석봉이 조필선 학사에게 써준 서책(시작가 8000만원)과 단원 김홍도의 ‘서과도·숭채도’(시작가 2500만원)도 새 주인을 찾지 못했다.
대통령 기념품의 인기도 예전만 못한 분위기였다. 이승만 전(前) 대통령이 쓴 휘호 ‘풍우표령지제 위국언론창달’(시작가 4500만원), 대한민국 공군 창설을 주도한 고(故) 장지량 대사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편지(시작가 200만원)가 유찰됐다. 박 전 대통령이 주문 제작한 골프채 3개(우드 2, 3, 4번) 세트는 경합 없이 시작가에 낙찰됐다.
공균파 아이옥션 실장은 “전략적으로 출품한 작품들이 대부분 유찰됐는데, 이런 (고가의) 물품을 수집하는 분들이 오늘 경매장을 찾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며 “추운 날씨를 감안하면 경매 참가자는 여느 때보다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경매장을 찾은 이들은 “새해 첫 경매인 덕에 평소보다 더 잘 된 것 같다”고 평했다.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고미술품에 대해 배웠다는 김종위(43)씨는 “5~6년 전에 비하면 고미술품의 인기가 덜한 것 같다”고 평했다. “수집가들이 세대 교체가 안 되는 것 같아요. 평일에도 경매장을 다닐 시간이 되는 중년 주부들이 많아야 고미술품시장이 잘 되는데.” 그는 “억대 작품은 미술관이나 박물관급이나 돼야 구입할 여력이 되고, 몇 천만원을 붙인 물품은 보존 상태가 좋아야 팔린다”고 귀띔했다. 20년차 수집가인 그는 이번 경매에서 도록에 미리 별표를 해둔 목판 한 점을 20만원에 낙찰 받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경매장을 빠져나간다. 누군가는 찍어뒀던 물품을 손에 넣었고, 누군가는 빈손으로 돌아간다. 경매가 진행되는 내내 손에 쥐고 있던 도록을 다시 펴본다. 물고기 모양 주전자, 금채화가 그려진 찻사발(茶碗), 반들반들 광이 나는 3단 차탁. 30만~40만원이란 시작가가 붙은 사진들을 보니 ‘역시 응찰 신청서를 써볼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든다. 조선시대에 만들었다는 분청 대접에 붙은 가격표는 20만원. 옷 한 벌 살 돈을 들이면 역사책의 한 장을 집에 들여놓는 셈이다. 다음 번에 경매장을 찾을 때는 도록을 미리 살펴보리라, 다짐하면서 종로를 떠났다.
◆연회비를 내고 경매회사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 도록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참여 방법은 세 가지다. 경매 전에 미리 가격을 제시하는 서면응찰, 경매장에서 참여하는 공개응찰, 경매가 진행될 때 직원과 통화하며 참여하는 전화응찰이다. 경매회사에 지불하는 구매 수수료와 배송비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