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통신사인 SK텔레콤은 10년 전만 해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우량 대기업이었다. 2005년 SK텔레콤은 매출 10조원에 2조6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고, 시가총액은 160억달러로 전 세계 모든 기업을 통틀어 427위에 올랐다. 일본 소프트뱅크(시가총액 335위)에 비하면 시가총액은 약간 적었지만, 기업 재무 상태는 훨씬 양호했다. 같은 해 소프트뱅크는 매출 8370억엔(한화 8조1000억원)에 영업이익은 254억엔(2400억원) 적자를 냈다.

10년이 지난 지금, 두 회사의 처지는 크게 바뀌었다. SK텔레콤이 국내 시장에 안주하는 사이, 소프트뱅크는 미국 이동통신사 스프린트를 인수하고 중국 알리바바를 발굴하는 등 과감한 투자를 했다. 그 결과 SK텔레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조8000억원으로 오히려 후퇴했다. 반면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매출 8조6720억엔(한화 82조원), 이익 6684억엔(한화 6조3500억원)으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이런 경영 성과는 고스란히 주가에 반영돼 글로벌 기업 시가총액 순위에서 소프트뱅크는 128위까지 약진했지만 SK텔레콤은 500대 기업 밖으로 물러났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기업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은 전 세계 수많은 기업 중 최고 기업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한국 기업 숫자가 2001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기업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기업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500대 기업서 밀려나는 한국, 약진하는 미국·중국

'FT 글로벌 500'을 본지가 분석한 결과, 올해 이 리스트에 포함된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차, SK하이닉스, 한국전력 4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4개를 기록했던 지난 2001년 이후 최저치다. FT 500에 포함된 한국 기업 수는 2006년과 2009년 9개로 고점을 찍은 뒤 감소 추세를 보여왔다. 'FT 글로벌 500'은 전 세계 시가총액 상위 500개 기업 순위를 집계한 것이다.

같은 기간 중국 기업의 역주(力走)와 미국의 재기(再起)가 두드러진다. 2007년 8개 기업을 해당 순위에 올리면서 랭킹에 나타난 중국은 올해 37개를 기록,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 중국공상은행은 올해 2분기 시가총액 기준 각각 전 세계 6위, 7위에 올랐다. 2005년 500대 기업 중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미국 기업들은 2011년 160개로 최저점을 찍은 뒤 올해는 209개를 기록했다.

우리 기업들이 500대 글로벌 기업 순위에서 밀려나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시장에 안주해 해외시장과 새로운 사업 분야 개척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금융사들이 대표적이다. 국민은행은 2005년에만 해도 시가총액 198억달러로 전 세계 은행 중 56번째, 모든 기업을 통틀어 328번째로 큰 기업이었다. 이때 싱가포르 DBS은행은 시가총액 140억달러로 겨우 500대 기업에 턱걸이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두 은행의 상황은 역전됐다. 국민은행의 시가총액은 30% 이상 감소한 반면, DBS은행은 2.6배 불어나며 303위로 약진했다. DBS는 자국의 작은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동남아 등지로 진출해 지난해 해외에서만 3조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반면 국민은행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은 500억원도 안 됐다.

한국 기업 고령화 가속… 역동성도 떨어져

순위에 오르는 기업이 자주 바뀌는 미국 등과 달리 한국 기업이 새로 순위에 들어오는 경우도 적다. 국내 기업 중 지난 10년 동안 FT500에 포함된 추가로 포함된 기업은 SK하이닉스뿐이다. 반면 지난 10년 동안 FT500에 포함된 미국 기업들은 큰 폭으로 변했다. 특히 FT500 내 미국 기업 톱20은 전체의 40%가 바뀌었다.

애플, 구글, 버라이즌커뮤니케이션스, 오라클, 페이스북, 월트디즈니, 아마존닷컴, AT&T 등 8개 기업이 지난 10년간 FT500 내 미국 기업 톱20 자리를 하나씩 차지했다. 일본도 소프트뱅크, 통신업체 KDDI, 로봇업체 화낙, 유니클로의 지주회사인 패스트리테일링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 8개가 10년 동안 상위 20개 기업에 편입됐다.

독일의 경우 자국 시가총액 기준 10위권이었던 제약사 바이엘이 2위, 15위권이었던 폴크스바겐이 1위에 등극했고, 생활산업용품 기업 헨켈 등 5개 기업이 새로 랭킹에 포함됐다.

우리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기업의 나이에서도 드러난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들의 평균연령은 2005년 32.9세에서 올해 37.8세로 높아졌다.

LG경제연구원 강승훈 책임연구원은 “젊은 혁신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 모델로 세계시장을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조직의 노화를 막지 못해 혁신과 변화의 의지를 잃게 된다면 더 이상 설 곳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