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P 발행 과정에서 2대 질권자인 현대엘리베이터에 각종 권리 부여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이 현대증권 지분 19.8%를 담보로 3900억원을 조달한 가운데 현대그룹이 2순위 질권자인 현대엘리베이터에 우선매수권 및 콜옵션(조기매수청구권)을 부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현대증권 주인은 언제든지 부실한 현대상선에서 흑자 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로 바뀔 수 있다.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빚만 6조원대인 현대상선을 ‘꼬리 자르기’하기가 수월해졌다.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에 1400억원을 대여해준 현대엘리베이터에 담보물(현대증권) 처분과 관련한 각종 권리를 부여했다. 이번 딜에 참여한 당사자, 투자자 측 모두 “현대엘리베이터가 우선매수권 및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게 맞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은 다소 복잡한 구조로 3900억원을 조달했다. 현대상선은 먼저 스마트업체1차, 스마트업체2차, 스마트업체3차란 이름의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했다. 그리고 SPC에 현대증권 지분 19.8%를 넘기고 2500억원을 조달했다. SPC들은 메리츠증권과 계약을 맺고 현대증권 지분을 신탁에 담은 뒤 ABCP 형태로 투자자를 모집해 현대상선에 돈을 빌려줬다. SPC 담보물 관리인은 각각 씨티은행과 대우증권, 한국투자증권이다. ABCP 투자자들은 메리츠증권이 모집했다. ABCP는 1년물이며 내년 11월 만기를 맞는다.
현대상선은 19.8%의 지분을 담보로 추가로 현대엘리베이터로부터 1400억원을 대여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SPC에 이어 2순위 질권자다.
ABCP를 발행한 메리츠증권은 현대상선이 ABCP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보장해준다. 메리츠증권은 먼저 투자자들에게 대납해준 뒤 현대상선이나 현대엘리베이터에 손실 보전 및 추가 수익을 요구할 수 있는 구조다.
현대엘리베이터는 만기 전에 콜옵션을 행사할 수도 있다. 투자자와의 계약서에 따르면 현대엘리베이터는 마음만 먹는다면 만기 전에라도 담보물(현대증권)에 대한 조기매수청구가 가능하다.
조기매수청구는 대출원리금, 혹은 최근 1개월간 가중주가평균 120% 중 큰 금액으로 가능하다.
현대상선이 표면적으로 현대엘리베이터를 내세운 이유는 신용보강이다. ABCP가 1년 만기로 발행됐는데 1년 후 현대상선의 신용능력만으로 원금 및 이자를 상환할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힘든 상태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현대엘리베이터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번 딜로 인해 현대그룹이 현대상선을 언제든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는 구조가 돼 헐값에 현대증권을 넘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앞서 현대상선은 현대아산 지분 34.79%, 반얀트리 호텔을 가지고 있는 현대엘앤알 지분 전량을 현대엘리베이터에 넘겼다. 현대상선이 가지고 있는 자산 중 상당수가 현대엘리베이터로 넘어간 상태다.
현대상선은 그룹 내 주력 계열사이기는 하지만 빚이 상반기말 기준으로 6조원에 이른다. 현대상선의 알짜 자회사가 현대상선 모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로 넘어갔기 때문에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을 처리하기가 수월해졌다. 현대증권을 완전히 현대엘리베이터 밑에 두게 되면 현대그룹 출자구도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현대글로벌→현대엘리베이터→현대증권 및 현대아산'으로 단순화된다.
금액도 논란이 될 조짐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이번 대여금 3900억원에다 이자를 지불한 가격으로 현대증권 지분 19.8%를 확보한 셈이다. 앞서 오릭스는 현대상선 지분 22.43%를 6475억원에 매수할 계획이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공개 매각을 실시했을 때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현대증권이 넘어간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