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역사건축기술연구소 지음 | 돌베개 | 436쪽 | 3만원
“무릇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며 정치를 하는 곳이고 모든 백성이 우러러보고 있으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함을 나타내야 한다. 그 거처를 아름답게 꾸미고 건물만 화려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정조, ‘경희궁지’ 중에서)
조선의 궁궐은 각종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다. 궁궐을 떠올리면 숱하게 이곳을 스쳐 간 정치적 사건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전에 궁궐은 왕과 왕비, 왕족, 그들을 모시던 궁인까지 수많은 사람이 살던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우리 국민과 관광객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이 역사적 공간을 체계적으로 입체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한국 건축을 연구하는 집단인 역사건축기술연구소가 기획한 ‘궁궐 사전’ 첫 번째 결실이다. 조선 5대 궁으로 꼽히는 경복궁, 덕수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가운데 창덕궁과 후원, 창경궁까지 이야기를 먼저 담아 출간했다.
다양한 컬러사진과 함께 궁 전체를 조감한 권역도와 건물 배치도를 적절히 배치해 건물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다. 또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동궐도’, 1907년 제작된 ‘동궐도형’ 같은 옛 기록화를 통해 시기별 건물의 변화는 물론 지금은 없어진 건물의 자취까지 보여준다. 경복궁과 덕수궁을 다루는 책은 내년 상반기 출간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제목 그대로, 우리 궁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은 곁에 두고 볼 만한 책이다. 알찬 정보를 담은 본문 외에 ‘우리나라 목조 건물 들여다보기’ ‘주요 용어’ ‘조선왕실 세계도’ 같은 요긴한 부록들도 눈길을 끈다. 이 중 ‘궁궐에서 누리는 작지만 큰 즐거움’에 실린 사진과 설명을 출판사 허락을 얻어 발췌 소개한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졌던 창경궁 문정전
창경궁 문정전 마당은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진 곳이다. 1762년(영조 38) 윤달 5월 13일, 영조는 선원전에 나가 숙종 어진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부인 정성왕후 신주를 모신 휘령전으로 가면서 왕세자를 불렀다. 휘령전은 정성왕후 혼전의 전호이며, 당시 문정전 건물을 한시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뒤늦게 도착한 세자가 마당에 엎드려 사배를 올리자 왕은 군사를 시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엎드린 세자가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다른 신하들이 달려와 명을 거두기를 청하자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도록 했다. 이로부터 여드레 뒤, 왕세자는 뒤주에서 죽었다.
◆창경궁을 각별하게 여긴 영조의 자취
창경궁은 다른 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비중이 높지 않았던 곳이다. 왕이 이곳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도 드물다. 그렇지만 영조는 창경궁에 대한 애착이 각별했다.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는 데 힘을 쓴 숙종 계비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빈전을 통명전에 모시고 스스로 통명전 부근에서 지냈다. 발인 후에는 혼전을 문정전으로 삼았다. 자신은 숭문당이나 함인정을 이용하며 신하들을 문정전에 불러 나랏일을 의논했다. 나중에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계비 정순왕후를 맞았는데, 청혼하는 의식이나 예물 보내는 의식을 모두 명정전에서 치렀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실내 창문은 어떤 모습이었나
창경궁은 침전 건물이 그나마 제대로 남아 있는 궁궐이다. 그러나 겉모양만 옛 모습일 뿐, 내부는 미스터리가 많다. 특히 실내 온돌방에 설치했던 장지문의 실체는 정확한 모습을 지금도 잘 모른다. 장지는 창호지를 안팎에서 얇게 바른 미닫이문을 가리킨다. 보통 침전의 온돌방은 두 칸, 또는 네 칸 크기다. 필요하면 장지를 제거해 모두 개방하고, 잠잘 때는 다시 장지문을 달아 폐쇄된 한 칸 또는 두 칸의 아늑한 공간을 꾸미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장지를 고정시키는 문틀을 떼었다가 붙였다가 했다.
◆부용정에서 바라보는 주합루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하던 1776년에 세워졌다. 1781년(정조 5), 왕은 주합루에 자신의 초상화, 즉 어진을 봉안하도록 했다. 어진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주합루는 왕이 머무는 전각 같은 뜻을 지니게 됐다. 그 뒤 왕은 1793년(정조 17) 주합루 아래 연못가에 부용정을 고쳐 세웠다. 꽃피는 계절이면 신하를 불러 부용지 못가에서 시를 짓고 뱃놀이도 허락했다. 신하들은 부용지 위 언덕 높이 있는 주합루를 바라보며 왕의 존재를 몸으로 느꼈다. 왕명으로 지은 신하들의 시구에 왕을 칭송하는 구절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군주의 위상을 높이려던 정조의 치밀한 정치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연경당에서 보는 조선 최고급 살림집
애련정 뒤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연경당은 자타가 인정하는 조선 최고 수준의 건축이다. 대문간을 지나 중문간에서 오른쪽 문을 들어가면 사랑채, 왼쪽 문을 가면 안채가 나타난다. 사랑채 곁에는 큰 규모의 서재가 있고 서재 뒤에는 한 칸짜리 아담한 정자 농수정이 있다. 효명세자가 1827년에 지은 이 집을 고종이 즉위하고 3년째 되던 해인 1875년에 고쳐 지었다. 수렴청정을 하던 조 대비(효명세자 비)가 이 전각을 고쳐 아직 배필을 맞지 못한 고종에게 민간 살림집 같은 새집을 마련해준 것이다. 건물 세부 하나하나가 정교하면서 전체가 하나로 잘 융합돼 부분과 전체의 뛰어난 조화를 보여준다.
◆의두합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자신의 서재로 지은 집이다. 처음 집 이름은 석거서실이었다고 한다. 석거문 곁의 책 읽는 방이라는 뜻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전후로 툇간을 뒀다. 동쪽 끝의 한 칸은 누마루로 꾸며 휴식할 수 있도록 했다. 가운데에 있는 온돌방은 책 읽는 곳이었다. 의두합 서쪽 끝에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비좁은 반 칸 크기의 방과 반 칸 크기의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방이 있다. 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짐작된다. 효명세자는 이 집 주변의 열 군데 경치를 두고 ‘의두합십경’이라는 시를 지었다.
◆인정전의 중층 구조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궁궐의 핵심 전각이다. 왕실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의례와 온갖 잔치가 벌어졌던 곳이다. 마당에는 품계석이 늘어섰다. 처음 지어진 건 창덕궁이 창건되던 1405년이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1609년(광해군 1)에 재건했던 건물은 1803년 궁궐에서 발생한 화재로 다시 불탔다. 지금 건물은 이를 1804년에 복구한 것이다. 인정전은 현존하는 국내 중층 건물 가운데 가장 안정감 있는 구조를 자랑한다. 기둥이나 대들보, 도리 같은 부분이 치밀하게 가공돼 적정한 비례감을 보여준다. 19세기 초에 지어진 이 건물에는 오랜 기간 이어진 건축에 대한 심미안, 건물을 짓는 기술이 잘 녹아 있다고 평가된다.
◆아들의 공부를 배려한 아머지 마음이 담긴 성정각
숙종이 왕세자를 위해 지은 성정각은 대청마루가 트이고 동쪽으로는 보춘정이라는 이름의 누마루까지 갖춘 곳이다. 효명세자는 이곳에서 입학례를 치렀고, 대리청정을 맡은 1827년부터 3년 동안 여기서 신하를 접견하고 학문을 익혔다. 성정각 누마루는 공부에 피로한 심신을 달래기에 알맞다. 숙종은 성정각을 완공한 뒤 ‘세자의 몸가짐을 경계하는 열 가지 글’을 지었다. 어른에게 문안 드리는 일,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는 일, 강학에 힘쓰기, 혼자 있을 때 조심할 일,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 충언을 좋아하는 일 등을 일깨우는 글이었다.
◆대조전 후원의 화계
꽃 계단이라는 뜻의 화계는 우리 궁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침전이나 후궁 별당같이 주로 여성이 거처하던 건물 뒤 언덕에 조성했다. 돌을 쌓아 몇 단의 층단을 만들고, 각 단마다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갖가지 꽃나무를 심었다. 간혹 인공적으로 단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경사지가 많은 창덕궁에서는 일부러 언덕을 꾸밀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운 화계가 이뤄진 곳이 많다. 그 가운데 지금도 원형을 잘 남기고 있는 곳이 대조전 후원의 화계다.
◆창덕궁 금천교를 지키는 상상의 동물
정문을 들어서서 다리를 지나 물을 한 번 가로지르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창덕궁에서는 돈화문을 들어서서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한 번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천교를 지난다. 이 금천교 아래 물길이 지나는 다리 한가운데 위아래로 물속을 응시하고 있는 웅크린 동물상이 있다. 물길을 따라 침입하려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려는 모습이다.
◆왕실 가족의 마지막을 장식한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이 자신의 서재로 지은 건물이다. 뒤에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석복헌을 곁에 세우면서 건물 뒤 언덕에 아름다운 정자와 꽃담을 꾸몄다. 20세기 초,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하자 황후 윤비는 낙선재를 거처로 삼았다. 6.25 전쟁으로 서울을 떠났던 윤비가 다시 낙선재로 돌아온 것은 1961년이다. 이후 낙선재에는 영왕과 그 가족이 돌아왔고,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도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낙선재에 머물던 왕실 가족들은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났다. 지금은 이들이 살다 간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