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028260)이 여유있게 합병에 반대한 미국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을 누르고 합병 승인을 받았다. 외국인 주주들 상당수를 삼성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대거 개인 주주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합병이 성사되면서 이재용 부회장은 사실상 지주회사인 통합 삼성물산 대주주로, 명실상부한 그룹의 ‘오너’가 되었다.
이날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주총에는 주주만 552명이 참석했다. 삼성물산은 250석 규모의 5층 대회의실외에 150석 규모의 4층 회의장에 주총장을 개설하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했다. 9시 30분에 시작한 주총은 여러 개인주주들이 발언하면서 1시간 30분이 지난 11시에야 투표가 시작됐다. 중복 위임한 주주들이 많아 1호 의안인 합병안 개표가 끝난 것은 12시 30분이었다. 참석률은 83.57%에 달했다. 지난 3년간 삼성물산 정기 주총 참석률은 60% 중반대였다. 20%포인트 정도의 주주가 투표에 더 참여한 셈이다.
첫 번째 안건인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에 대해서는 찬성 69.53%(9202만3660표), 반대 30.47%(4033만2140표)로 찬성이 이뤄졌다. 합병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참석 주주의 3분의 2(66.67%)로부터 찬성표를 받아야한다. 2.86%포인트 차로 합병에 성공한 셈이다.
이번 투표 결과는 삼성 입장에서 낙승을 거둔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은 “예상보다 표 차이를 크게 벌였다”고 말했다. 삼성이 확보한 고정 우호 지분은 30.99%(삼성계열사 및 특수관계인 13.82%, KCC 9.96%, 국민연금 11.21%). 삼성 입장에서 27.92% 만큼 추가 득점 한 셈이다. 여기에서 삼성자산운용과 삼성생명 특별계정 지분(1.92%)은 중립으로 셰도우보팅(다른 주주들의 표결에서 찬반 비율대로 표를 나누는 것)을 했고, 국내 기관투자자(9.14%)는 대부분 찬성표를 던졌을 거라는 게 금융투자업계의 설명이다. 이를 감안하면 외국인과 개인주주에게서 확보한 표는 17.45%다.
반면 엘리엇은 자체 지분(7.12%)와 일성신약(2.11%), 중립표(0.59%)을 제외하면 16.0%를 추가로 얻었다. 외국인 지분(26.41%)의 5분의 3에 불과하다. 하지만 외국인 가운데 10%가 넘는 지분이 엘리엇에 동참하지 않았다. 엘리엇 입장에서 힘이 대폭 빠진 것이다.
재계와 금융투자업계는 외국인이 대거 엘리엇의 손을 들어주면서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점치는 기류가 강했다. 한 삼성 고위 관계자는 “삼성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서 은행, 증권사, 자산운용사들에게 전방위적인 설득 작업을 했다”며 “미국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여러 기관 투자자들이 지지를 했다”고 귀띔했다. 개인주주들의 참여도 합병 찬성에 도움이 됐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10%포인트 전후의 지분을 개인주주들로부터 위임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삼성은 13일부터 전방위적인 소액주주 설득에 나섰다. 신문, TV, 인터넷 등을 통해 합병 찬성 호소 광고를 내보내면서, 5000명 가량의 전현직 임직원이 가가호호 방문해 일대일로 합병 찬성을 호소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소액주주들이 대거 합병에 찬성해 엘리엇이 내건 ‘명분’의 힘을 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최치훈 사장은 주총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이번 합병을 계기로 주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며 “약속 드린 주주친화 정책도 차질 없이 시행해 나가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경영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엘리엇은 “수많은 독립주주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합병안이 승인된 것으로 보여져 실망스럽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추가 소송 등도 염두해 두고 있다는 의미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가결되면서 ‘이재용 체제’가 실체화 됐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이전까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생명의 대주주(지분율 20.76%)인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자격으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면, 이제 “사실상 의 지주회사사”인 제일모직 대주주(지분율 16.40%)로 삼성 계열사 전부를 지배하게 됐다는 얘기다.
두 회사가 결합되면서 합병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1%와 삼성생명 지분 19.3%를 보유하면서 사실상 지주회사가 됐다. ‘통합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로 이어지는 완결된 지배구조가 만들어진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005930)(4.1%), 삼성엔지니어링(7.8%), 제일기획(030000)(12.6%), 삼성SDS(삼성에스디에스(018260)·17.1%), 삼성바이오로직스(4.9%)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제일모직은 삼성생명(032830)지분 19.3%를 보유하고 있었다.
동시에 통합 삼성물산은 이재용 부회장(16.40%),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5.47%),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5.47%) 등 3세들이 안정된 지분을 보유한다. 이건희 회장(2.84%) 등 오너 일가의 지분은 총 30.15%. 여기에 계열사(9.35%)와 특수관계인(0.97%) 지분, 우호 지분인 KCC(8.89%) 지분을 모두 더하면 절반에 육박하는 49.37%에 달한다. 자사주를 제외할 경우 지분율은 총 54.80%에 달한다.
이 때문에 재계와 금융투자업계는 통합 삼성물산이 다른 계열사와 재차 합병을 하거나, 계열사 사업부를 분할해 흡수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대주주의 지분율이 30%~40% 정도면 안정적으로 지주사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며 “10% 정도 지분율이 줄어도 여력이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합병안이 통과되면서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 등의 건설 계열사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은 합병을 추진했지만, 합병 법인의 미래를 불확실하다고 본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대거 행사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최근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이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 합병 계획은 당분간 없다”고 밝혔지만, 일각에서는 계열사 매각이나 통합 등 어떤 식으로라도 개편안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