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자동차가 작년 말 일본에서 출시한 수소연료전지 자동차 '미라이(未來)'는 지난달 말까지 예약 판매 대수가 1500대에 이른다. '미라이'는 올가을 미국과 유럽에서도 시판된다. 하지만 도요타보다 1년 10개월 앞선 2013년 4월 세계 최초의 수소차인 투싼ix 양산(量産)·판매를 시작한 현대자동차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273대를 파는 데 그쳤다. 이미 수소 충전소 40개를 운영 중인 일본은 2020년까지 2000개로 늘린다는 목표 아래 관련 인프라 구축을 서두르고 있는 반면, 수소 충전소를 10개만 운영하고 있는 한국은 구체적인 계획조차 없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부의 지원이 전무(全無)하다 보니 수소차를 먼저 양산하고도 일본에 뒤처지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차(電氣車) 분야에서는 중국이 한국을 압도한다. 중국은 올 들어 5월 말까지 2만5800대의 전기차를 생산했으나 한국 내 전기차 생산 물량은 올 들어 넉 달 동안 1155대에 불과하다. 22분의 1도 안 되는 초라한 성적표이다. 한국 주력 산업인 스마트폰·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한국을 맹추격하는 중국은 수년 내 한국 제조업 추월을 공언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2조원 규모의 국부(國富) 펀드를 만들어 반도체 분야 자국 업체에 대대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산업 경쟁에서 한국만 유독 뒤처지고 있다. 중국은 범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인 전략과 로드맵을 세워 제조업 육성에 나섰고 일본은 정부와 정치권과 재계가 똘똘 뭉쳐 '삼각 구조'를 이뤄 산업 경쟁력 강화 노력을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정부 차원의 뚜렷한 산업 정책이 보이지 않는 데다 기업 활동을 옥죄는 규제가 난무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원칙적으로 민간기업이 산업 발전의 주역이 돼야 하지만, 중국은 물론 선진국인 일본도 정부 주도(主導) 산업정책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상황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다가는 '동북아 제조업 삼국지(三國志)'에서 한국만 유일한 패자(敗者)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독일 같은 제조 强國 될 것"
2010년부터 7대 신성장전략 산업 투자를 대규모로 진행 중인 중국은 최근 더 업그레이드된 산업정책을 내놓았다. 올 5월 국무원(한국의 국무총리실 격) 주도로 10대 제조업 분야를 집중 육성해 독일·일본과 같은 반열의 제조업 강대국이 되겠다는 '중국 제조 2025 계획'이다. 10대 분야는 차세대 정보기술(IT)과 로봇, 항공·우주·해양 설비, 신에너지산업 등이다. 특히 건설기계·해양플랜트·인프라건설 같은 중장비(重裝備) 산업 육성 의지를 분명히 했는데 이는 한국의 주력 산업과 겹친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중순 '중국 제조 2025'를 견인할 범정부 차원의 사령탑인 '국가제조강국건설 영도소조(領導小組)'를 구성했다. 마카이 국무원 경제담당 부총리가 조장을 맡는 이 소조에는 경제 기획 부서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위원장과 24개 경제 관련 부처 차관급 인사 4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일본은 아베 총리 집권 후 경제산업성(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과 게이단렌(經團連·한국의 전경련) 합작으로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 아베 총리는 2013년 가을 임시국회를 '성장전략 실행국회'로 명명하고 '산업경쟁력 강화법' '국가전략특별구역법' 등 9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에 맞춰 수소차 등 차세대 자동차 산업 육성, 통신환경 개선을 위한 규제 정비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경제산업성은 '로봇 활용'을 국가 성장 전략으로 채택해 제조업 각 분야에서 로봇을 최초 도입하는 사업자에게는 비용의 50~70%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올 5월엔 동남아 등 신흥국 대상으로 에너지 인프라를 수출하는 '에네볼루션(Enevolution·에너지와 혁명의 합성어)' 전략도 내놓았다. 아베 총리는 게이단렌 등 산업계 관계자, 학자 등이 참석하는 '유식자(有識者) 회의'를 주재하며 산업계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
규제 개혁에서도 일본은 한국보다 몇 수 위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그레이존 해소 제도'를 도입해 기업들이 신규 사업 추진 전에 어떤 규제를 적용받을지 한 달 안에 미리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닛산차는 운전자 심장마비 등 긴급 상황 시 컴퓨터 제어로 차를 정지시키는 기술을 실제 차량 제작에 적용하게 됐다. '규제 그레이존 해소'를 수년째 외쳐온 한국 정부는 이달 들어서야 입법에 나섰으나 국회 통과 여부가 불투명하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우리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R&D를 주도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며 "현 정부 들어 R&D 세액공제율이 더 줄고 규제만 늘어나는 게 증거"라고 말했다.
◇"한국은 산업정책 不在…산업통상자원부 존재감 없어"
이런 현상은 3개국 주력 기업의 성장력 격차로 직결되고 있다. 본지와 전경련이 연간 매출액 10억달러가 넘는 한·중·일 3국 기업의 작년 평균 매출액 증가율을 분석한 결과, 한국은 중·일 기업의 3분의 1에 그쳤다. 작년 한 해 한국 기업(170개) 성장률은 1.8%인 반면, 작년 1~3분기 중국 기업(274개)과 일본 기업(780개)은 각각 5.6%와 5.5% 성장한 것으로 확인됐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과 일본이 '미래 먹거리'인 신성장 산업 분야 육성을 위해 국가적 지원 역량을 쏟는 데 비해 한국 정부에서는 산업정책이 아예 실종됐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산업통상자원부와 미래창조과학부가 신성장 산업 분야를 나눠먹기식(式)으로 관리하다가 올 3월 19대 미래성장동력 사업으로 재통합됐다. 하지만 19개 과제별로 '연구개발비 나눠주기'란 비판이 나온다. 민관이 1조원을 투입해 중소·중견기업 공장 1만개를 '스마트 공장'으로 바꾼다는 '제조업 혁신 전략'은 예산 확보도 불투명하다.
한 경제단체 고위 임원은 "중국과 일본은 산업경쟁력 강화에 국가적 총력전을 펴는데, 우리나라는 대통령 혼자만 보일 뿐"이라며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존재감이 없고 구심점 역할을 못 하는 게 큰 문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