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10일 오후 3시부터 3시간 30분 동안 오는 17일 삼성물산(028260)주주총회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에 대한 입장을 논의하기 위해 투자위원회 회의를 가졌다. 국민연금은 자체적으로 찬성 또는 반대를 결정했는 지, 아니면 자문기구인 주식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의결위)에 결정을 요청했는 지 대해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찬성을 의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투자위원회에서는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CIO)를 비롯해 각 실장들과 홍 본부장이 위촉한 팀장급 직원 몇 명이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것은 6시 30분. 중간중간 정회를 거듭하면서 3시간 30분 가량 격론을 벌인 것이다. 홍 본부장을 비롯해 각 실장들은 1시간 뒤인 7시 30분께 일제히 퇴근했다. 홍 본부장을 비롯한 회의 참석자들은 회의 결과와 과정에 대한 일체의 언급도 거부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서 국민연금은 찬성 입장을 정했다. 한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사결정의 세부 내용은 오는 17일 열리는 삼성물산의 주주총회 이후에 공시할 것”이라면서도 “찬성 입장으로 논의가 정리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과 기금운용본부 내 각 실장들이 참석해 투자와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의결기구다.

국민연금은 주주총회 의결권을 어떻게 행사했는 지 주총 15일 후 공개한다. 따라서 이번 투자위원회에서 비공개 결정이 내려진 것은 타당한 행동이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 일각의 시각은 싸늘하다. 한 외국계 운용사 관계자는 “국민연금 가입자의 재산을 위탁 관리하는 기금운용본부의 성격을 감안하면 어떠한 기준에서 사안을 논의했는 지도 밝히지 않은 것은 ‘밀실행정’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주주명부가 폐쇄된 지난달 11일 현재 지분 11.21%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삼성의 확실한 우호 지분이 19.78%에 불과한 실정이라 삼성 입장에서 국민연금의 합병 지지가 절실했다. 주총 참석률을 70~80%로 가정할 경우 합병 안건 통과 기준인 참석자 3분의 2를 넘기려면 26.89~33.55%의 지지를 추가로 모아야 한다. 국내 기관 지분이 11.05%에 불과한 상황이라 국민연금의 지지가 없으면 사실상 합병이 무산될 수 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중립을 지켜 셰도우보팅(다른 주주들의 표결에서 찬반 비율대로 표를 나누는 것)을 하면 엘리엇이 추가로 3% 전후의 우호지분을 확보하게 돼 승률이 대거 높아진다. 이 때문에 삼성 측은 김신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이 “국민연금이 찬성해주면 합병 성공을 확신한다”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조선비즈는 주총 참석률과 엘리엇의 외국인 지분 확보 비율에 따라 엘리엇이 합병을 부결시키기 위해 추가로 필요한 지분을 계산하였다. 마이너스 값이 클 수록 엘리엇이 국내 주주들로부터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그만큼 엘리엇이 불리하고, 삼성이 유리하다. 계산 결과 삼성이 합병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주총 참석률이 80% 이상이고, 엘리엇 지지를 선택한 외국인 지분이 전체 외국인 지분의 절반 이하가 되어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의 지지는 합병안이 통과되기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은 11.61%(지난달 15일 기준), 제일모직 지분은 5.04%(지난달 5일 기준)이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각각 1조1000억~2000억원 어치로 비슷하다. 이 때문에 미국 의결권 자문사 ISS와 국내 의결권 자문사 기업지배구조원이 삼성물산 주주 입장에서 합병이 불리하다는 보고서를 냈음에도 찬성으로 결론을 낼 수 있었다는 게 금융투자업계의 분석이다.

한편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으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제도 개편을 초래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국민연금은 대부분의 의결권 심의는 투자위원회가 맡지만, 투자위원회가 판단하기 곤란한 사안은 자문기구인 주식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의결위)에 결정을 요청할 수 있다. 의결위는 정부, 사용자단체, 근로자단체, 지역가입자단체, 연구기관 등이 추천한 외부 인사 9명으로 구성된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민감한 사안의 의결권 행사를 국민연금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한 위원은 “지난해 의결권과 관련된 권한을 투자위원회가 모두 가지고 가면서, 사실상 외부 위원회 조직은 힘을 잃었다”며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도 유명무실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