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한국은행은 "5월 경상수지가 86억5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하면서 지난 2012년 3월부터 39개월간 최장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갔다"고 발표했다. 한국 경제가 1986년 6월부터 38개월간 이어갔던 연속 흑자 기록을 넘어서는 새 기록을 만들었다. 올해 연간 흑자 규모가 사상 최대 기록을 세운 지난해(894억달러)를 넘어서 1000억달러를 돌파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신기록을 발표한 한은에서는 환호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불안한 달러 풍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수출과 수입이 모두 줄어드는 데다, 수출보다 수입이 더 가파르게 줄어 흑자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중반 흑자 행진이 수출입 급증으로 이뤄졌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기록은 한국 경제가 식어가고 있다는 징후로도 볼 수 있다.

수출·수입 동반 감소로 쪼그라드는 경제

39개월 연속 흑자 기록을 세운 5월 상품 수출과 수입은 두 자릿수의 동반 감소세를 보였다. 수입이 수출보다 더 크게 줄었다. 상품 수출 금액은 438억70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3% 줄었고, 수입 금액은 346억8000만달러로 19.8%나 감소했다. 상품 수출은 5개월 연속, 상품 수입은 8개월 연속 줄어들었다. 저유가가 이어지면서 관련 제품의 수출과 수입이 모두 감소했다. 중국 가공무역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은은 분석했다. 중국의 경기가 둔화되고 있는 데다, 중국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중간재 공급을 늘리면서 우리나라가 중간재나 부품을 수출하고 중국 기업들이 가공해 최종 제품을 만들어 미국 등에 수출하는 가공무역이 줄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경상수지 흑자 행진은 이런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1986년 6월부터 1989년 7월까지 38개월 평균 수출증가율은 34.4%, 평균 수입증가율은 26.5%였다. 반면 이번에 기록한 39개월 최장 연속 흑자의 경우, 수출은 평균 0.2%, 수입은 4.7% 감소했다. 한국 경제가 쪼그라들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 매출액 증가율 12년 반 만에 최저

수출이 줄어들면서 올 1분기 국내 상장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12년 6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3000여곳을 표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매출액 증가율이 작년 같은 기간 대비 4.7% 감소했다. 2003년 3분기(-6.3%) 이후 최저치다. 국제 유가 하락으로 정유업계의 매출이 추락한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원화 가치 상승에 따른 수출 가격경쟁력 저하, 중국에 의한 해외시장 잠식 등으로 수출 전선에 적신호가 켜진 영향도 크다.

환율에 특히 민감한 업종에 속하는 현대자동차의 경우, 올 1분기(1~3월) 국내외 판매량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6% 감소했다. 경쟁국인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은 아베노믹스가 본격화된 2012년 11월 이후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49%나 낮아짐으로써 막강한 가격경쟁력이 생긴 반면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같은 기간 3%가 떨어졌을 뿐이다. 원·엔 환율은 2012년 말 100엔당 1430원대였지만, 최근에는 900~910원대에 머물고 있다. 지난달 초에는 891원대로 2008년 2월 이후 7년 3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일본의 수출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은 지난 4월 8%에 달했다.

현대자동차는 수익성도 급격히 악화됐다. 작년 1분기 9%였던 영업이익률이 올 1분기에는 7.6%로 낮아졌다. 반면 같은 기간 도요타는 6.6%에서 8.9%로, BMW는 11.5%에서 12.1%로 높아졌다. 기술 격차를 좁히며 디스플레이패널, 스마트폰 등 우리나라 수출 주력품 분야에서 무섭게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중국 기업들의 위협은 한국의 수출을 옥죄는 또다른 요인이다.

"구조개혁으로 경제체질 바꿔야"

수출의 성장 기여도가 떨어지면 내수라도 제 몫을 해줘야 하는데, 소비 위축은 이미 한국 경제의 만성 질환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간소비 증가율은 2012년부터 3년째 1%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1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와 급격한 고령화는 소비 활력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2011년 이후 3% 안팎으로 간신히 지탱되던 경제성장률이 올해는 더 떨어질 조짐이다. 이에 정부와 한국은행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연 1.5%로 낮춘 데 이어, 정부는 15조원 이상의 효과를 내는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수출과 내수의 동반 침체가 이런 구조적인 원인을 갖고 있는 만큼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나 정부의 단기 부양책인 추경 편성 같은 대증요법식 처방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에 경제 전문가들은 구조 개혁이라는 결정적인 ‘세 번째 화살’도 강하게 쏘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수출과 내수의 동반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부양책 외에 부실 기업 정리, 노동 개혁, 산업 구조 개편 등 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구조 개혁을 강도 높고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노동·공공·교육·금융 등 4대 개혁을 “욕을 먹더라도 추진하겠다”(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입장이지만, 방향도 잡지 못하고, 속도도 내지 못하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한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으려면 단기적인 경기 대응도 필요하지만, 경제 전반의 구조를 뜯어 고치려는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