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밤 8시가 다 돼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못 받았더니 이번엔 문자와 메일이 동시에 들어왔다. 대신경제연구소였다. “오늘 보내드린 SK와 SK C&C 합병 관련 보고서는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쉽게 말해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SK그룹, 지배구조 완성 막바지’라는 이 보고서는 이날 오전 11시에 발표됐는데, SK와 SK C&C의 합병 비율이 SK 주주에게 불리하다는 내용과 이를 만회하려면 합병 후 자사주 소각 같은 주주 환원 정책을 펴야한다는 내용이 주로 담겨있었다. 보고서 귀퉁이엔 “두 회사의 합병에 법적인 하자는 없다”는 문구도 있었지만, SK측은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SK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 자료 때문에 합병이 미뤄지면 각오하라고 하시네요.” 대신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외국계 헤지펀드가 삼성물산 합병을 문제 삼는 것이 신경쓰여 그런 것 같다며 곤란한듯 말을 잇지 못했다.
기업구조개편을 위한 합병은 대주주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뤄지기 쉽다든지, 주주환원을 더 펼쳐야 한다든지 하는 주장은 사실 원론적인 수준의 얘기다. 게다가 이미 이 자료는 일부 언론에서 다뤘고 인터넷에서 검색 한번만 해봐도 찾을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것과 진배 없는 얘기지만, 경제연구소측에선 그래도 ‘성의’를 보여야 하는 모양이다.
금융그룹에게 대기업은 중요한 고객, 일종의 ‘갑’이기 때문에 대기업의 항의를 쉽게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갑’에게서 “일이 잘못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는 식의 고압적인 항의 전화라니. “이런 일이 한두번인가요” 라는 말에서 일종의 체념이 느껴졌다.
이 보고서는 두번째 발표날이 26일 이후로 잡혔다. 보고서 내용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26일은 SK와 SK C&C의 합병이 승인되는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이다.
SK그룹은 제2의 엘리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잡음 없이 합병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지만 재계 3위 SK그룹 명성에 걸맞지 않은 촌극임에는 틀림 없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