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수출 기업인 현대차기아차는 올 1분기 국내외 판매량이 작년 1분기 대비 3.6%, 2.7%씩 감소했다. 도요타, 혼다, 다임러, BMW, 폴크스바겐을 포함한 11개 글로벌 완성차 메이커를 통틀어 11위, 10위로 사실상 '꼴찌'이다. 더 심각한 것은 수익성 악화다. 작년 1분기 9%이던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은 올 1분기 7.6%로, 기아차는 6.2%에서 4.6%로 각각 떨어졌다. 반면 BMW의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11.5%에서 12.1%로, 도요타는 6.6%에서 8.9%로 상승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은 "현대·기아차의 부진은 신차 경쟁과 연비 경쟁에서 밀린 탓도 있지만, 유로화와 엔화 약세 속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고 있는 게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글로벌 환율 전쟁에서 밀리면서 국내 수출 기업들이 신음하고 있다. 엔저(円低)에 이어 유로화 약세까지 겹치면서 박빙(薄氷)의 글로벌 경쟁을 벌이는 자동차·조선·철강 업체들이 줄줄이 밀리고 있다.

◇수출 주력 업종, 円低 직격탄

일본 최대 조선기업인 이마바리조선은 최근 총 400억엔(약 3700억원)을 투자해 600m 길이의 초대형 독(선박 건조장)을 짓고 있다. 일본 조선업체의 독 신설은 1999년 이후 16년 만이다. 한국과 중국 기업에 밀려 사라져가던 일본 조선업계가 엔저에 힘입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가격 경쟁력으로 재무장한 이들은 한국이 장악하던 초대형 컨테이너선과 LNG선 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일본은 올해 중국을 제치고 세계 수주량 2위가 됐다. 홍성인 KIET 박사는 "한국 조선업계가 진짜 경계해야 할 대상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말했다.

울산항에서 수출용 운반선에 오르려고 대기 중인 현대차. 엔화와 유로화 등이 약세를 보이면서 가격 경쟁력에 비상등이 켜진 현대차는 올 1분기 전 세계 판매량이 3.6% 감소해, 글로벌 경쟁사 중에서 가장 나쁜 성적을 냈다.

철강업계도 마찬가지다. 일본 철강기업들은 동남아 시장에서 한국산보다 최고 5% 정도 싼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한 대형 철강사 임원은 "2013년까지 적자이던 일본 철강업계가 엔저 효과로 지난해부터 대부분 흑자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대(對)일본 수출 경쟁력도 떨어지고 있다. '종가집 김치'로 유명한 대상FNF는 올 들어 환율 때문에 일본 수출액이 11% 줄었다. 한국의 대일 수출액은 올 들어 4월까지 20% 정도 감소했다.

중견·중소기업들 '죽을 맛'

중견·중소 수출기업은 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상당수 기업은 엔저로 인해 한국산이 일본산보다 비싼 가격 역전(逆轉)현상이 벌어져 수출 중단을 고민하고 있다. 한 섬유업체 관계자는 "방한(防寒) 재킷 1㎏당 가격은 한국산이 24.3달러인 데 비해 일본산은 23.3달러 수준"이라며 "일본산이 한국산보다 싸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선박용 엔진부품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 중인 전북의 A사는 "일본 조선사들이 3년 전 1㎏당 2달러이던 납품 가격을 올해 초 1.7달러로 내렸는데, 지금은 다시 1.3달러까지 깎아주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한다"고 했다. 밸브 수출업체 B사는 올해 일본 수출 단가를 7~10% 정도씩 인하했다. 엔저로 인한 환율 손실분을 그대로 떠안은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엔저 상태가 지금처럼 지속되면 내년에는 수출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환율로 인한 경쟁력 약화가 장기적으로 한국 기업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내부 보고서에서 "도요타가 지난해 거둔 영업이익 증가분인 2000억엔(약 1조8000억원) 가운데 환율에 따른 환차익만 1750억엔(약 1조6000억원)"이라고 추정했다. 도요타는 이렇게 번 돈을 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에 쏟아붓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일본과 유럽 기업들은 환율로 축적한 이익을 앞으로 R&D와 마케팅에 본격 투입할 것"이라며 "환율의 충격파는 지금부터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