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앞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다고 전격 공시(公示)했다. 페루 등 외국 정부를 상대로 고액(高額) 소송을 벌여 상당한 이익을 챙긴 '강성(强性) 펀드'인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3대 주주(株主)로 깜짝 등장한 것이다. 삼성물산의 1대와 2대 주주는 삼성그룹 관계인(13.99%)과 국민연금(9.79%)이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폴 싱어(71) 사장이 지난 2012년 미국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 참석한 모습. 싱어 사장이 이끄는 엘리엇매니지먼트는 4일“제일모직의 삼성물산 합병안은 삼성물산 주주의 이익에 반한다”면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 회사는 삼성물산 지분 7.12%(1112만5927주)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수뇌부인 미래전략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계열사인 삼성물산의 문제일 뿐 그룹이 나서서 설명할 사안이 아니다"며 "합병에 아무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삼성은 그룹 후계 구도 재편과 직결되는 합병 작업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헤지펀드의 지분 매입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어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삼성물산 주가는 이날 10.32% 급등해 엘리엇은 이날 하루에만 723억원을 벌었다.

삼성 "합병 문제없다…단순 차익 목적"

지금까지 삼성물산 지분 4.95%를 보유하고 있던 엘리엇은 최근 며칠간 2.17%의 지분을 추가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엘리엇은 이날 별도 자료를 통해 "지분 보유 목적은 '경영 참여'"라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삼성물산에 불리한 구조로 돼 있어 합병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엘리엇이 동조(同調) 세력을 규합해 '합병 무산' 카드로 삼성그룹을 압박한 다음 상당한 차익(差益)을 챙기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았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엘리엇은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 기업을 흔드는 외국 세력에게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엘리엇 측 관계자는 "우리의 주장은 주주 가치 제고(提高)이며 삼성물산이 합병 비율에서 제일모직에 비해 너무 불리하게 산정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엇이 단순 차익을 넘어 추가 지분을 매입하거나 합병 반대 소송을 걸 수 있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4일 외국계 기관투자자가 외국인 전용 주식 거래 계좌를 통해 삼성물산 주식 155만주(지분율 약 1%)를 사들였는데, 이 기관투자자가 엘리엇과 관련됐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합병 비율에 불만을 품은 일부 주주들이 '반대주식 매수를 위한 주식 매수가격 결정 신청'을 통해 합병 작업을 방해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삼성 측은 이에 맞서 합병 해당 기업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최고경영자들(윤주화 사장·최치훈 사장)이 직접 주요 주주들을 만나며 설득 작업의 강도를 높였다. 삼성 관계자는 "대다수 장기 투자자들은 합병 발표 후 두 회사의 주가(株價)가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합병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두 회사가 합병하려면 7월 17일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출석 의결권의 3분의 2, 발행 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 경우 제일모직은 이재용 부회장을 포함한 오너 일가(一家) 및 특수관계인 지분이 52.24%여서 문제가 없다. 반면, 삼성 측 지분이 13.99%인 삼성물산은 지분율 32.1%에 달하는 외국인들이 연대해 합병에 반대할 경우 급(急)브레이크가 걸릴 수 있다. 삼성 관계자는 "외국인 주요 주주들을 만나 합병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헤지펀드 공격 대상된 것 反省해야"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외국계 헤지펀드가 기업 경영 활동을 뒤흔든다"는 비판이 팽배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계열사의 한 CFO는 "헤지펀드가 합병 발표가 나온 후 지분을 추가 매입한 것은 회사를 흔들어 이익을 내려는 의도"라며 "기업 경영에만 전력을 다해도 만만찮은 상황에서 경영권을 흔들려는 세력과 전쟁을 벌여야 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외국계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됐다는 것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일모직은 지난해 상장(上場) 후 반 년도 안 돼 주가가 두 배로 오른 반면, 주가가 제자리 걸음 상태인 삼성물산 주주들이 '합병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을 품어왔는데 헤지펀드가 이 틈을 파고 들었다는 것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헤지펀드라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주주(株主) 입장에서만 본다면 엘리엇의 행동은 타당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