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서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의 합병은 2013년부터 진행해온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작업의 정점을 찍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심근(心筋) 경색으로 쓰러져 1년 넘게 의식 불명 상태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대신해 명실상부한 '이재용의 삼성그룹'으로 만들기 위한 큰 틀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이달 15일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상징적으로 그룹을 승계했다면 오늘 합병은 현행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라고 말했다.
◇합병법인, 삼성전자 지배권 강화
합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물산 합병 법인'의 대주주로 등극함과 동시에 그룹의 간판 주력 기업인 삼성전자에 대한 직접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삼성물산이 보유 중이던 삼성전자 주식 4.1%를 '삼성물산 합병 법인'을 통해 이 부회장이 고스란히 이어받는 데다, 이건희·재용 부자(父子)가 직접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4.0%를 더하면 이재용 부회장 측은 8%가 넘는 지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그 결과 이 부회장은 삼성생명을 거치지 않고 삼성전자를 직접 지배하게 됐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200조원을 넘는 상황에서 1%만 확보하려 해도 2조원이 드는데,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은 이런 난제를 푸는 절묘한 해법"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취약점 중 하나는 금융회사인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의 1대 주주(7.2%)라는 점이었다.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약칭 금산법)에서는 금융회사가 비금융회사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법 제정 이전에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삼성생명은 예외적으로 이를 초과하는 주식을 보유해 왔다. 향후 관계법령 추가 개정으로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일정 부분 처분하거나 의결권을 제한받는 상황을 맞을 수 있는 게 부담으로 지적돼 왔다.
◇"이재용 스타일 리더십 구축해야"
삼성그룹은 2013년 9월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의 제일모직 패션사업 부문 인수를 시작으로 최근 1년 6개월여 동안 숨 가쁘게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벌여왔다. 이번 합병으로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진 만큼 다음 수순(手順)으로는 삼성전자와 삼성SDS 간의 합병과 삼성생명의 중간 금융지주회사 전환 여부가 거론된다.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당장 삼성SDS는 불과 한 달 전에 2020년까지 매출 20조원 수준의 글로벌 IT컨설팅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비전 2020'을 내놓았다. 이를 뒤집고 다시 삼성전자와 삼성SDS의 합병을 추진하는 것은 투자자에 대한 신뢰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SDS는 삼성물산이 지분 17%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합병하기보다는 이재용 회장이 일정 지분을 매각해 상속 비용으로 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삼성생명의 중간 금융지주회사 전환도 삼성전자 지분(7.2%)을 삼성물산 합병 법인이 인수하는 데 드는 비용 부담을 고려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작업은 일단락됐다"며 "남은 과제는 이재용 부회장이 어느 시점에서 회장 공식 승진을 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선 이재용 지배체제 구축을 넘어 이 부회장 색깔의 리더십 구축이 더 긴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이번 합병으로 이재용 체제의 틀을 갖췄지만 이재용 부회장만의 비즈니스 성과와 리더십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승계 구도가 완결됐다고 단정하기 힘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