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얘기를 좀 해야겠다. 대학입시때 전자공학과를 택했다. 전자공학이 좋아서가 아니고 별생각 없이 주변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미국 유학 길에 올라 전자공학 석사과정에 들어갔지만 재미는 찾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수업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몇 년을 방황하다 들은 한 수업에서, 철학을 만나게 됐다. 희한한 일이었다. 전자공학에서 생기지 않았던 공부에 대한 흥미가 철학에서 생겼다. 이후 전공을 바꿔 박사과정은 철학과로 진학했다. 그 뒤 한동안 철학을 공부했다.
내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나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One thing only I know, and that is that I know nothing)"라고 말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벼락이 내 몸을 통과해 지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나 자신의 오만함을 스스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위대한 철학자가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나은 점이 최소한 자신은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다니….
이후 나는 바뀌었다. 사회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직업도 철학교수를 택해,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나 자신을 항상 돌아보면서 반추하는 버릇이 생겼고, 철학 강의를 하면서 실제로 내 인생을 즐기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철이 든 것이다.
중간에 그 좋아하던 철학 강의를 관두고 1990년 한국에 들어온 것도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샘표는 할아버지가 세운 회사였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끔찍이 사랑하셨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을 해주셨다. 부모는 반대하셔도 내가 밴드 활동을 한다면 기타를 사주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세운 샘표는 당시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 대신 회사를 맡을 사람도 없었다. 사촌동생들도 나보다 열 살 이상 차이 나고 20대가 대부분이었다. 가문의 종손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가업을 잇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우선 회사 일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막연히 회사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일하기가 너무 싫어 '내가 간장 장사하려고 여태 공부하고 고민하고 이렇게 살아왔나'라는 생각도 했다. 몇 년간은 일을 제대로 못 했다. 돌이켜보면 오만함이 나를 다시 채운 셈이다.
그러다가 무심코 회사의 업무를 뒤적거리던 중 간장에 대해 알게 됐다. 모든 음식에 들어가고 수천 년 동안 발전해왔고 우리 선조의 정성과 가치가 들어가 있는 간장, 말하자면 간장은 우리 음식 문화의 근간(根幹)이었다. 나는 '내가 회사에 대해 그리고 회사가 만드는 간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는 우리 장(醬)을 잘 계승하고 업그레이드하자는 생각으로 회사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오만함을 다시 한 번 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빨리 싸게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식문화와 입맛은 많이 망가져 있었다. 음식 맛은 획일화돼 우리 맛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미세한 차이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을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 흐름은 간장도 똑같았다. 간장에는 진간장, 양조간장이라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알고 보면 모두 산업화 시대 산물이었다. 돈은 별로 없고 당장 생산량을 증진시키기 위해 대량생산 기술을 들여와 진간장이다, 양조간장이다 하는 것들을 만들었다. 원료나 재료, 발효 방법 등이 모두 옛날 전통적인 맥을 잇는 게 아니라, 산업화 시대에 맞춰진 것이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장이 된 뒤에는 전통적인 한식 간장을 복원하는 일부터 했다. 그래서 4년 동안 연구해 한식 간장이라는 제품도 내놨다. 진간장, 왜간장은 콩과 밀을 섞어 만들지만, 한식 간장은 콩만을 사용해서 만든다. 이것이 일본 간장과 한국 전통 간장이 다른 점이다. 한식 간장은 강하지 않고 은은한 맛이라 식재료의 본래 맛을 살려준다. 그 효과를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하는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식의 맛을 더 좋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입맛은 양조간장에 길들어 있지만 한국 음식엔 한식 간장이 잘 어울린다. '요리에센스 연두'라는 엷은 색의 한식 간장도 내놨다. 나트륨의 함량을 30% 이상 줄인 소금의 대체재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한식 간장과 요리에센스 연두를 이용해 한국의 장을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2012년부터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알리시아 요리과학연구소와 손잡고 한국의 전통 장을 유럽 음식에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소스인 간장, 된장, 고추장, 연두 등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작업이다. 다시는 오만해지지 않고, 한국 전통 간장이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날이 오도록 끝까지 한번 해볼 생각이다.
[박진선 사장은]
박진선(65) 사장은 샘표식품 창업자인 고(故) 박규회 창업주의 손자이며 박승복 샘표 회장의 아들이다. 경기고,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1997년 샘표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는 "샘표를 한국의 대표 식문화 기업으로 키우고 세계인에게 우리 맛을 알리는 데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국제한식문화재단 이사와 한국유니세프 이사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