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마스터 디자이너 토르스텐 밸러씨는 "제품 기획 단계부터 디자이너들을 참여시키고 아이디어를 살려 줘야 좋은 디자인이 나온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지난해부터 회사 내에 '디자인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주요 경영진이 모여 제품 디자인 개발 과정을 점검하고, 좋은 디자인이 소비자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협의하는 자리다.

이 자리엔 덴마크 출신 디자이너 토르스텐 밸러(Valeur)도 참여한다. 그는 고급 오디오 뱅앤올룹슨의 제품 디자인을 전담하는 회사 '데이비드 루이스 디자이너스(David Lewis Designers)'의 최고경영자(CEO)이자 LG전자의 '마스터 디자이너'도 맡고 있다. 마스터 디자이너는 제품 디자인 전반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디자이너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사람이다. LG전자 디자인 위원회 참석차 한국을 찾은 그는 "디자이너는 배우와 같다"고 말했다.

"배우는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물)가 아니라도 사이코패스를 이해해야 합니다. 디자이너도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고객에게 어떤 효용을 줄 수 있는지 모르면서 그저 '기술이 있으니까 제품을 만든다'는 식이어서는 곤란하죠." 그는 "구체적으로는 기능을 시각화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며 "속에 담긴 기술은 복잡하더라도 사용자는 아주 쉽고 간단하게 느끼도록 디자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 기업이 제품을 만들고 디자인하는 과정은 생산 현장의 컨베이어 벨트와 비슷했다. 기술진이 기능과 사양을 제시하면 디자이너가 이를 보기 좋게 만들고 공장에서 양산 여부를 검토하는 일이 순서대로 이뤄졌다. 밸러씨는 이런 과정을 고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디자이너를 포함한 모든 영역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함께 의견을 나눠야 합니다. 반복해서 논의하는 과정이 더 피곤할 수도 있지만 그래야 기술과 디자인 양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완성도가 나올 수 있어요."

iF·레드닷 등 세계적 디자인 공모전 수상작 중에는 한국 기업의 작품이 많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소비자들은 한국 제품의 디자인이 세계 수준에 못 미친다고 지적한다. 밸러씨는 이런 괴리가 생기는 원인으로 한국 기업의 문화를 들었다. "한국 디자이너 개개인의 능력은 훌륭한데 기업의 수직적 분위기 속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사장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를 피하려면 수평적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를 제품 기획 단계부터 의사 결정에 참여시켜야 합니다. 최종 출시된 제품을 보며 기술진뿐 아니라 디자이너도 '내 작품'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디자인입니다."

그가 뱅앤올룹슨을 위해 디자인한 제품 중에는 원뿔 중간중간에 원반을 끼워넣은 듯한 모양의 오디오 '베오랩6'처럼 익숙한 형태에서 벗어난 것이 많다. 하지만 정작 그는 "튀는 형태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라며 "제품 수명이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처럼 교체 주기가 짧은 제품은 그때의 트렌드를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대물림해 오래 쓰는 제품은 시대가 달라져도 새롭게 느껴지는 형태를 시도할 수 있지요." 예컨대 지금도 명차(名車)로 손꼽히는 1960년대의 자동차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자동차와는 상당히 다른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튀는 형태로 만들더라도 왜 그런 모양이 나오는지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고 튀기만 하는 디자인은 이상한 디자인일 뿐"이라고 했다.

교체 주기가 길든 짧든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소로는 '디테일(세부 요소)'을 들었다. "제품에 사용된 평면이 완벽한 평면인지, 살짝 굽어 있다든지 하는 것이죠. 한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작은 차이가 고객이 받는 느낌을 좌우합니다. 완벽해 보이고 손에 잡아보고 싶은 느낌이 들도록 하는 차이가 여기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