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만들어낸 엔저(低)가 가속도를 내면서 엔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100엔당)이 900원 선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엔 환율은 903.04원으로 거래를 마감(오후 3시)했다. 장중 902원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시점인 2012년 10월 초(1430원대)에 비해 500원이 넘게 떨어졌다.

엔화 가치는 끝을 모르게 추락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36개월째 경상수지 흑자 행진을 이어가는 데다 최근 국내 증시로 외국인 자금이 몰리면서 상대적으로 원화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등 우리나라 주력 수출 품목에서 상대적으로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신승관 국제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엔화 가치 하락이 가속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 약화 부담이 커지고 있다"며 "상당히 고통스러운 시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엔저에 발목 잡히는 한국 기업들

우리나라 수출은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3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주춤하고 있다. 수출 증가율은 올 1월에는 전년 동기(同期) 대비 -0.9%였지만 2월 -3.3%, 3월 -4.3%로 악화하고 있다. 한국의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전(家電)·휴대폰·철강 등 주력 제품의 수출이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100엔당 900원 선을 위협받을 정도로 엔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23일 원·엔 환율이 903원 선까지 떨어져 해외시장에서 일본 기업과 경합하고 있는 국내 수출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 면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엔저의 심화는 우리 수출 기업을 더욱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대다수 주력 수출 품목은 일본과 겹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출의 80%를 차지하는 석유화학·반도체·자동차·가전·선박 등 주력 13개 산업군의 대부분이 일본의 주력 수출품과 중복된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한국과 일본 간 수출 경합도' 수치 역시 0.501 (2013년 기준)에 달한다. 수출 경합도가 0.5를 넘는다는 것은 수출품 구성이 절반 이상 겹친다는 뜻이다. 수출입은행은 "원·엔 환율이 10% 하락할 때마다 우리 수출이 평균 4.6% 감소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일본과의 경합이 가장 치열한 자동차산업의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이항구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은 "자동차는 한·일 간 수출경합도가 다른 산업의 배 수준에 달해 피해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원·엔 환율 10% 하락 시 자동차 수출액은 12% 정도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 성장 기여도에서도 내수에 역전

엔저는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의 성장세 둔화, 세계 경기 회복 지연 등으로 가뜩이나 코너에 몰린 한국 수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환율 조작에 가까운 엔저 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에 대해 "주변국을 거지로 만드는 전략"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던 것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수출입은행의 최근 설문 조사에서 453개 수출 기업은 손익분기점 원·엔 환율을 972.2원이라고 응답했다. 900원 선이 붕괴될 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이 기업들은 올해 이익을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베노믹스의 영향이 본격화한 지난해부터 한국 수출은 가라앉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에 대한 수출과 내수의 기여도가 지난해부터 역전됐다.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수출 주도형 경제로 알려졌지만, 지난해에는 3.3% 성장하면서 수출이 1%포인트, 내수가 2.3%포인트 기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 3.1% 성장률 전망도 수출(1%포인트)보다 내수(2.1%포인트)의 기여도가 더 높다. 이런 수치는 수출이 성장 엔진이라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은이 이날 발표한 '2014년 기업경영분석' 자료도 우울한 소식을 담고 있다. 지난해 국내 주요 기업(1536개 상장법인과 195개 비상장 주요 기업)의 매출액이 전년보다 1.5% 줄었다. 한은이 2003년 관련 통계를 작성, 관리한 이후 최대 폭의 감소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엔저에 따른 수출 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될 경우 기준금리를 현행 수준(연 1.75%)으로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면서 "한은이 기준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시그널(신호)을 시장에 보내줘야 원화 가치 강세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