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 고갈로 엄청난 재정 부담으로 자리 잡은 공무원연금 개혁을 놓고 정치권이 진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그만큼이나 시급하게 개혁해야 할 연금이 또 있다. 전 국민의 노후 보장 수단인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한 해 50조원씩 돈이 불어나 올해 500조원 시대를 맞았지만, 조직 구성과 운용 방식은 기금 규모가 40조원에 불과했던 1999년 체제에 머물러 있다. 몸이 훌쩍 커졌는데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현실은 숱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감사원 감사에서도 부실한 재정 추계와 기금운용위원회의 비전문성, 기금 출자 기관에 대한 공단의 낙하산 인사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공무원연금 등 다른 현안에 묻혀 국민연금 개혁이 흐지부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재정 추계 엉터리… 고갈 앞당겨질 수도

현재 국민연금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재정 추계가 엉터리여서 실제로는 기금이 언제 고갈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지난 2013년 제3차 추계를 실시해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여기에 쓰인 가정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 벌써부터 실제와 상당한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재정 추계에서는 기금이 매년 회사채 수익률의 1.1배를 운용 수익으로 거둬들일 것으로 전망하면서 2013~17년 회사채 평균 수익률을 5.9%로 가정했다. 하지만 글로벌 초(超)저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실제 회사채 수익률은 현재 1%까지 떨어졌다. 자연히 기금 운용 수익이 재정 추계에 크게 못 미치는 일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2013년과 2014년 기금의 예상 운용 수익률은 각각 5.17%, 6.27%였지만 실제는 이보다 1%포인트가량 낮은 4.19%, 5.25%에 그쳤다. 재정 추계에서는 기금이 2013년 20조820억원의 투자 수익을 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16조6513억원에 불과해 한 해에만 3조원 넘게 비었다.

수익률 가정이 허약하다 보니 재정 추계 전체의 신뢰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기관별로 계산 방법에 따라 고갈 시점이 최대 10년이나 차이가 난다. 장기 재정 추계는 국민연금 기금이 2060년쯤 고갈될 것으로 추산하지만, 국회예산처와 금융연구원은 이보다 7년 이른 2053년이면 바닥날 것으로 본다. 고려대 박유성 교수처럼 2050년 이전에 고갈을 전망하는 전문가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시장 상황이 급변해 기금 운용에 적색 경고등이 켜졌는데도 새로운 재정 추계가 나오려면 2018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관련법에 따라 장기 재정 추계를 5년마다 한 번씩 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지도에 큰 오류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보건사회연구원 원종욱 미래전략실장은 "75년간 고갈 걱정 없는 캐나다도 3년마다 재정 추계를 다시 하는데, 여기에 비하면 국민연금은 너무 느긋하다"고 말했다.

수익 높일 배당 정책, 내부에서 제동

기금 운용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비전문성도 해결되지 않는 고질병이다. 20명으로 구성된 기금운용위원회는 가입자의 대표성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기업, 노동조합, 시민단체 대표 등 대부분 투자 비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회의도 1년에 4~5차례밖에 열리지 않다 보니 심도 있는 토론이 이뤄지지 못하고 중요한 결정이 미뤄지기 일쑤다.

소속 단체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안에서는 위원들이 기금의 이익과 배치되는 의견을 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2월 열린 기금운용위원회에서는 기업의 배당을 높일 방안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배당률을 높여야 기금의 수익도 높아지고, 한국 주식시장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도 높아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안건은 "배당 확대 요구가 경영권 간섭이 될 수 있다"는 경제단체 출신 위원들의 반대에 막혀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보류됐다. 위원장인 복지부장관은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공단 퇴직 직원 낙하산 투입

그런가 하면 국민연금이 투자한 각종 사회기반시설 관련 자회사에 국민연금공단 출신들이 낙하산으로 내려갔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투자한 ○○도로, △△대교 등의 이사진에 공단 직원 출신들이 대거 포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회사들은 대표이사 등을 선임할 때 '공단 출신에 한해서는 관련 분야 근무 경력이 없어도 된다'는 식의 특혜 조항을 두고 공단 이사장이 대표이사를 최종 지명하는 등 공단 출신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채용 방식을 채택했다. 덕분에 한 피투자회사에서는 공단 출신 인사가 3차례 연속 대표이사로 선임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기금운용본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공단 퇴직자들 자리 마련해 주려고 기금운용본부 독립을 막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전 세계 연기금 중 셋째로 많은 500조원의 자금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는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투자 시장에서 '수퍼 갑(甲)'으로 통하지만, 국민연금공단 내에서는 일개 소수 조직에 불과하다. 기금운용본부의 인사와 예산권도 공단이 쥐고 있어 때때로 마찰이 빚어지기도 한다. 한 국민연금 관계자는 "사람 한 명 뽑는 것도 일일이 간섭받다 보니 국민연금 운용역 1인당 운용하는 자금이 해외 연기금보다 2~3배가량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