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올해 창립 54주년을 맞았다. 과거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등 창업세대 기업인들이 주축을 이뤘던 시절, 전경련은 경제성장은 물론 88올림픽 유치와 같은 국가적인 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하지만 지금 전경련은 국가 경제정책에 참여하기는커녕, 기업을 대변하는 기본적인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전경련이 이대로 쇠락의 길을 갈 것인지, 다시 제 기능을 회복할 것인지 짚어봤다. [편집자 주]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전경련 정기총회’는 전경련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4개로 구성된 중앙 테이블에 재계 30대 그룹의 오너 회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장단 중 참석자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김윤 삼양사 회장, 강신호 전 전경련 회장(동아쏘시오 회장) 등 3명뿐이었다. 허 회장의 GS그룹 계열사인 GS파워 손영기 사장이 허 회장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전경련은 “회장단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행사”라고 애써 해명했지만, ‘정기총회’라는 이름에 걸맞은 행사라고는 보긴 어려웠다.
전경련의 진성회원인 오너 회장 대신 기업의 대외업무 담당 직원들이 나와 자리 일부를 채웠다.
이들 중에는 초임 과장이나 대리급 직원도 눈에 띄었다. 전경련 정기총회는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최소 5~6명의 회장단을 포함, 주요 그룹 오너와 임원들이 얼굴을 비쳤던 행사였다.
전경련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 나왔다. 지난 2010년 조석래 효성 회장이 사임한 뒤 7개월간 공석이었던 회장직을 허창수 현 회장이 맡겠다고 했을 때, ‘흔들리는 전경련이 바로 서야 한다’는 의견이 잇달았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전경련의 위상이 높아졌는지 의문이다.
회장단 회의가 비공개로 바뀌면서 내부용으로 전락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경련은 정기총회에서 30대 그룹 오너 경영인 가운데 회장단을 선임하고, 회장단은 1년에 5차례(통상 1, 3, 5, 9, 11월) 회의를 연다. 과거 전경련은 여기서 논의된 사안을 경제 현안에 대한 재계의 의견으로 공표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전경련은 회장단 회의 결과를 따로 공표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3월 “133조원의 투자 계획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성명을 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열린 회장단 회의에선 무엇을 논의했는지, 어떻게 의견을 모았는지 공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계에선 “전경련 회장단이 재계의 대표성을 상실했다”는 의견이 나온다.
멤버를 봐도 그렇다. 지난 10일 새로 회장단에 선임된 이장한 종근당 회장과 이승철 상근부회장을 포함한 회장단은 총 20명. “전경련 회장단에서 빼주지 않지만, 이미 나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박용만 두산 회장을 비롯해 구본무 LG회장, 김준기 동부 회장 등은 이미 전경련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여기에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등은 대외 활동이 여의치 않다. 결국 허창수 회장과 이승철 부회장을 제외하면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는 4~5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전경련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 회원을 회장단에 가입시키려 노력해왔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모두 고사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네이버·다음 등 2000년대 급성장한 IT업체들은 아예 전경련 가입을 피하고 있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이른바 4대 그룹의 위상이 커진 것도 전경련의 위축의 또 다른 원인이다. 한 10대 그룹 대관 담당 임원은 “4대 그룹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직접 표현하는 것이 여론의 지지를 훨씬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며 “전경련이라는 단체를 거쳐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왕양(汪洋) 중국 부총리와 기업인들의 연쇄회동은 이러한 전경련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지적이 많다. 당시 왕 부총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가장 먼저 만났고, 이후 대한상의를 방문했다. 다음날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과 연쇄회동을 하고 나서야 전경련이 주재하는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