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지난해 외국계 은행에서 연봉 1억원을 받다가 퇴직한 이모(44)씨. 이씨는 다른 외국계 은행으로부터 "연봉을 1억5000만원까지 올려줄 테니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곳은 신생 크라우드펀딩업체 오픈트레이드였다. 이씨는 "똑같은 업무를 반복하느니, 연봉은 반 토막 나더라도 대중들에게 온라인상에서 투자 기회를 열어주는 크라우드펀딩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며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폐업 위기에 처한 초창기 기업엔 투자 물꼬를 터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례2) 캐나다에서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IT개발자로 일하던 중국계 캐나다인인 로버트 티(Tea·30)씨는 지난 1월 한국 비트코인업체인 코빗으로 이직했다. 작년 말 코빗에서 인터넷에 올린 채용 공고를 보고 문을 두드린 그는 "다른 어느 아시아 국가보다 IT발전 잠재력이 높은 한국에서 내 재능을 쏟아붓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핀테크(Fintech)업계에 국내외 대형은행, 삼성전자·네이버 등 금융·IT 전문가들이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몰리고 있다. 강임호 한양대 교수는 "구글이나 페이팔에서 인재들이 퇴사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새로운 벤처기업을 만들듯, 최근 금융권과 대형 IT기업의 30~50대 경력자들이 핀테크업계에 몰려 새로운 인재들의 '용광로'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인재들 몰려

핀테크업체로 이직하는 인재들은 대부분 30대 중반~50세의 IT·금융·경영·마케팅 분야 경력직이 대부분이다. 이들 연봉은 종전 회사의 40~50% 선으로 대폭 줄었지만, 훗날 상장(IPO)이나 인수합병을 염두에 두고 일정의 스톡옵션을 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 핀테크 업체들은 아직까지 외부 투자금 등으로 직원 월급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금융권과의 제휴를 통해 서비스를 출시하면 수수료 등의 수익이 점차 늘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IT서버 보안을 담당해온 직원은 핀테크 기업에서 새로운 IT보안 시스템을 구축하고, 은행에서 대기업 대상의 금융 업무를 담당하던 은행원들은 핀테크업체에서 스타트업의 투자 및 투자전략을 짜주는 일을 주로 한다.

핀테크업체는 대부분이 창업한 지 2~3년밖에 되지 않고 직원 10~15명을 둔 작은 벤처기업이지만, 인력들은 어느 글로벌 기업 못지않게 화려하다.

2013년에 창업한 크라우드펀딩업체 '와디즈'는 산업은행 출신만 3명이고 LG생명과학, 런던정경대 출신 박사급 인재들이 근무 중이다. 국제기구 UN의 우주사무국에서 일한 유영석씨가 창업한 비트코인업체 코빗에는 세계 최고의 디자인 컨설팅 기업인 아이디오(IDEO), 미국 엑센추어 출신들이 이직했다. 치과의사인 이승건 대표가 창업한 간편 송금업체 비바리퍼블릭에는 삼성전자·네이버·다음카카오 출신 IT개발자들이 직원 11명 중 7명이다.

비트코인업체 코인플러그의 어준선 대표는 "지난해 억대 연봉을 받던 증권사 IB(투자은행) 담당자 2명을 스카우트했고, 요즘엔 글로벌 금융회사인 HSBC, JP모건, BOA 출신들의 이력서가 빗발치고 있다"고 말했다. 직원 8명을 둔 한국 NFC에는 세종텔레콤 송인권 부회장, GE캐피털 아시아 부사장을 지낸 홍병철씨가 고문으로 있고, 모바일 증권 서비스업체 두나무는 전체 직원 9명 중 5명이 서울대·연세대 출신의 IT개발자들이다.

최근 핀테크업체의 채용 경쟁률은 40대1까지 치솟고 있다. 30개의 카드 서비스를 한 개 카드로 통합하는 카드 서비스를 준비 중인 브릴리언츠. 이 회사는 지난달 5명의 IT개발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냈는데 네이버, LG유플러스 등의 경력직원 200여명이 몰려들어 40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간편 결제업체인 한국NFC는 지난 6일 마케팅·재무분야 등 5명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는데 이틀 만인 8일 현재 50여명이 몰렸다.

◇금융계 출신 창업 동력으로 부상

국내 핀테크업체가 인재들의 블랙홀로 급부상하는 이유는 핀테크 산업이 성장하면서 금융·IT분야 전문 인재들 사이에 창업 열풍이 불기 때문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엑센추어는 전 세계 핀테크시장이 2013년 29억달러에서 2018년 80억달러(약 8조7216억원)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통적인 금융업과 일부 대기업들이 불황에 시달리며 구조조정을 가속하는 등 사양산업으로 접어드는 것과 대조적이다.

‘창업’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금융계 출신 사이에서 핀테크는 새로운 창업 동력으로 뜨고 있다. 산업은행 출신인 신혜성 와디즈 대표는 “정년 보장도 되어 있었고, 조직에서도 이직을 뜯어말렸지만 나왔다”며 “적재적소에 돈을 공급하는 금융이 핀테크의 핵심인 소셜네트워킹서비스 혁명의 ‘연결고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담보가 있어야만 대출해주는 전통적인 은행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골드만삭스·마스터카드 등 월가 금융인들이 미국 실리콘밸리의 핀테크 창업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말 벤처붐이 일어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너도나도 벤처에 뛰어들었다가 쪽박을 찼던 전례를 교훈 삼아 무분별하게 핀테크로의 이직은 금물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핀테크

금융(financial)과 기술(technique)의 영문 합성어. 인터넷·모바일 공간에서 결제·송금·이체, 인터넷 전문 은행, 크라우드 펀딩, 디지털 화폐 등 각종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