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은행이 힘을 합쳐 부실 대기업을 회생시키는 절차인 '자율협약'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자율협약은 자금난에 빠진 대기업의 회생을 돕기 위해 돈을 빌려준 은행이 해당 기업과 자율적으로 협약을 맺어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절차를 의미한다. 하지만 은행들이 신규 자금을 지원하면, 해당 기업은 대부분의 돈을 은행 이외의 금융회사 혹은 개인들이 들고 있는 회사채 상환에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금자의 돈으로 상대적으로 고수익을 누리는 회사채 투자자의 원리금을 갚아주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회생을 위한 본질적인 영업 및 투자활동에 자금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해당 기업의 회생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은 국내 2위 전선업체인 대한전선의 자율협약 진행 과정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대한전선, 지원금 대부분 회사채 상환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2012년 2월 자율협약에 들어간 국내 2위 전선업체 대한전선이 자율협약 이후 조달한 자금 가운데 86%를 회사채 등의 상환에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전선은 자율협약 이후 총 9592억원의 은행권 채무 가운데 절반 정도를 출자전환(빚을 주식으로 바꾸는 것) 형태로 탕감받으면서, 5167억원을 신규 지원받았다. 여기에 대한전선이 자체적으로 3476억원을 유상증자(주식을 발행해서 돈을 모으는 것)로 마련했다. 신규 지원과 유상증자를 합하면 총 8643억원이다.

그래픽=박상훈 기자

이 정도 규모 자금이면 대한전선을 회생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대한전선은 아직까지 회생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자율협약에 돌입할 때 9652억원에 달했던 '비(非)협약채권' 때문이다. 자율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회사채 보유자 등이 대한전선에 빌려준 돈이 9652억원에 달했다는 뜻이다.

대한전선이 비협약채권을 갚지 못하면 그 즉시 부도가 난다. 이에 따라 대한전선은 회사채 등의 만기가 돌아오는 대로 갚았고, 가용 자금의 86%인 7429억원을 회사채 등 상환에 쓰고 말았다. 그러면서 고수익을 노린 증권사나 개인 등 대한전선 회사채 투자자들은 약속받았던 고금리를 모두 보전받았다. 그 결과 대한전선이 보유한 비협약 채권 규모는 2223억원으로 줄었지만, 운영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채권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추가로 빌려준 자금을 비협약채권 상환에 사용했다"며 "기업회생에는 자금이 거의 투입되지 못하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한전선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할 때 과도한 빚을 갚아서 재무구조를 안정화시키는 게 최우선이고 채권단도 이를 요구했다"며 "재무 건전성을 제고하기 위해 시장에서 조달한 차입금을 갚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무리한 자율협약, 결국 실패로 귀결

대한전선은 최근 은행들에 1300억원의 추가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지난해 말 매각에 실패하면서 추가 운영 자금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채권은행 관계자는 "1300억원을 지원하지 않으면 상장 폐지 등이 불가피해서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언제까지 자금을 투입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금융계는 대한전선이 애초에 자율협약보다는 법정관리에 어울렸다고 평가한다. 채무의 대부분이 시중은행에서 나왔다면 은행만 참여하는 자율협약으로도 회생할 수 있지만, 대한전선은 채무의 절반 이상이 회사채 등 비은행권 채무였다. 이에 따라 비은행권 채무도 탕감할 수 있는 법정관리가 보다 적절했다는 게 금융계의 평가이다.

법정관리는 기업 파산을 연상시켜 신용등급 추락 등 부작용이 있으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수반되는 데다, 회사채 투자자들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이에 따라 정치권 등의 요구로 정부는 법정관리보다는 자율협약으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은행 이외의 채권자들이 많은데도 무리하게 자율협약을 추진했다가 실패하는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다. STX·동부그룹 등은 자율협약 형식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지만,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다가 일부 계열사들이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기업을 구조조정 하려면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모두 조금씩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데, 은행의 희생만 강요하다 보니 기업 구조조정 작업이 잘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기업 구조조정 시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한 가장 적합한 방법을 채권은행들이 자율적으로 강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을 할 때는 돈을 빌려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기업 회생 가능성을 첫 순위에 놓고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대한전선도 법정관리를 했다면 좀 더 빨리 구조조정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율협약

채권 은행들과 기업이 자율적으로 협의해 기업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절차. 부채 탕감, 추가 자금 지원 등이 이뤄진다. 자금 지원 등을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채권단 100%의 동의가 필요해서 합의하기 쉬운 은행권만 참여한다.

워크아웃

1·2금융권 채권단이 함께하는 기업 구조조정. 자율협약과 내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구조 조정을 받는 기업의 자율성이 보다 제약되는 차이점이 있다. 채권단의 75% 동의가 필요하다.

법정관리

법원이 주도하는 기업 구조조정. 법원이 부채 탕감 금액 등을 결정하며, 채권단이 이를 거부하면 파산 절차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