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추진한 현대글로비스(086280)지분 13% 매각이 불발됐다.
시장에서 소화하기에는 물량이 많았고, 거래 조건도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면서 그룹의 지배 구조 개편까지 진행하려던 현대차그룹의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 정몽구 회장 父子 지분 매각 시도한 까닭은?
정 회장 부자는 지난 12일 씨티그룹을 통해 기관투자가들에게 현대글로비스 주식 502만주를 블록딜(대량 매매) 방식으로 매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현대글로비스 전체 주식의 13.4% 규모다.
정 회장 부자는 각각 430여만주(11.51%)와 1190여만주(31.88%)의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보유 주식의 3분의 1을 시장에 내놓은 셈이다.
매각 희망 단가는 주당 26만4000~27만7500원이었다. 12일 종가보다 7.5~12% 할인된 금액이었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1조3000억~1조4000억원어치였다. 이런 조건으로 13일에 거래를 하자는 것이 정 회장 부자의 제안이었다.
정 회장 부자가 지분을 팔려고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공정거래법상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려는 의도가 첫 번째 이유로 꼽힌다.
공정거래법은 그룹 총수와 특수관계인이 계열사 지분 30%(비상장사 20%)를 가진 회사를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제를 피하기 위해 정 부회장은 지난해 그룹 내 광고대행사인 이노션의 지분 30%를 모건스탠리 PE 등에 매각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정의선 부회장의 승계에 있다는 분석이 많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 고리를 끊고 현대모비스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재편할 가능성이 크다. 정 회장 부자가 현대글로비스를 매각한 자금으로 앞으로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이 될 현대모비스 지분을 높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매각해 1조3000억원 정도의 현금을 확보하면 지주회사 역할을 할 것이 유력한 현대모비스 지분의 약 5%에 해당하는 550만주 정도를 취득할 수 있다. 특히 현대제철이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5.7%)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 같은 분석은 설득력을 얻었다.
◆ 매각은 왜 무산됐나?
하지만 13일 주식시장이 열리기 전 이 거래는 무산됐다. 방대한 물량을 소화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거래 조건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분의 직접 매각이라는 방식이 기존의 시장 예상과 다른 선택이었다는 점도 거래 무산의 이유로 꼽힌다.
현대글로비스는 지난 12일 현재 시가총액이 11조원이 넘을 만큼 주식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대차그룹이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합병할 가능성, 또는 정 회장 부자가 현대모비스 지분을 가진 현대제철이나 기아차와의 주식 교환(스와프)을 통해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현대모비스 지분으로 바꿀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이런 거래가 성사되려면 현대글로비스 지분 가치가 최대한 높게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반영돼 현대글로비스 주가는 지난 12일 종가 기준 30만원까지 올랐다.
하지만 시장의 예상과는 달리 정 회장 부자는 주식을 팔아 현금화하고, 이를 추후 지배구조 개선에 쓰는 방안을 택했다.
이는 현대글로비스 주식은 앞으로 현대모비스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주식이 아니라는 신호가 시장에 전달된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그렇다면 현재의 현대글로비스 주가가 과도하고, 정 회장 부자가 팔겠다고 내놓은 가격 역시 매력적이지 않은 셈이 된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정 회장 부자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기 위해 현대글로비스 지분율을 30% 아래로 낮춰야 한다는 점까지 감안할 때, 매수자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조건이었다”면서 “특히 정의선 부회장 지분까지 시장에 나온 점이 이번 거래의 매력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