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기자

자동차 업계 최고경영자(CEO)의 신년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치다. 특히 1년 자동차 판매 목표 대수는 자동차 업계 상황과 함께 그 회사의 경영 전략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래서 자동차 업계 출입 기자들은 정몽구 현대기아 회장이 시무식에서 어떤 숫자를 발표할지 촉각을 세우고 취재경쟁을 벌인다. 심지어 기자들끼리 매년 시무식을 앞두고 숫자 맞추기 게임을 벌이기도 한다.

정몽구 회장은 지난 2일 열린 시무식에서 올해 820만대를 만들어 팔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800만대를 만들어 판 점을 감안하면, 올해 세계 자동차 시장을 어둡게 본 셈이다. 또 내실 경영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정 회장은 또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전부지에 지을 본사 건물 규모를 105층으로 못박았다. 중·대형차 판매를 늘려야 한다는 중기 계획도 알려줬다. 시장의 궁금증이 많이 풀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동통신 3사 대표이사들의 신년사는 실망스럽다. 모두 화려한 수사로 신년사를 했지만, 올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월 1일 자로 부임한 장동현 SK텔레콤 사장의 신년사는 “새로운 30주년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는 해”로 시작한다. 하지만 무엇을 통해 첫 걸음을 내딛겠다는 것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새롭게 도전하자, 역량 있는 파트너와 폭넓게 제휴하겠다”면서 알맹이 없는 말을 늘어놨다.

황창규 KT 회장은 “그동안 연습게임을 뛰었고, 올해는 본게임을 뛰는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역시 집중하는 분야나 구체적인 목표, 새로운 비전을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눈에 띄는 말도 무선, 인터넷, TV, 글로벌 등 두루두루 잘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의 경우에는 ‘出寄制勝(출기제승·기묘한 계략을 써서 승리한다)’이라는 멋진 키워드를 제시했다. 내용을 살펴보면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통신 3사가 모두 하려는 것들을 언급했을 뿐이다.

해당 회사 홍보실에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문의도 해봤다. “저희도 잘 모르겠는데요.”, “덕담 수준 아니겠습니까? ”라는 수준의 허탈한 답만 돌아왔다.

전문가들은 이동통신사들이 눈에 띄는 신년계획을 내놓지 못하는 한 이유로 통신 산업의 구조를 꼽는다. 이동통신 3사는 좁은 국내시장에서, 그것도 과점 상태에서 비슷한 모델로 사업한다.

실제 이동통신사들의 해외 매출 비중은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하다. 업계 1위 SK텔레콤도 1%가 채 안 된다. 통신사들이 그동안 추진한 해외 사업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여기에 이들 3사는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가 각각 5:3:2의 점유율을 유지하는 과점(寡占) 체제를 수년째 이어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점유율을 잃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창조적인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내는 데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동통신사 CEO들은 해외 매출로 이어지지도 않는 안방 속도경쟁으로 점유율 싸움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 최고 속도, 세계 최초 상용화를 자랑스럽게 외치지만 해외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성장 동력으로 만들지 못한다. 여기에 상당수 소비자가 통신서비스에 불만을 가진다는 점도 곱씹어볼 일이다.

많은 소비자가 통신요금이 비싸다고 생각한다. 지불한 단말기 값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서비스에 감동한 기억도 별로 갖고 있질 않다. 사랑받는 기업이 되는 것도 CEO가 노려야 할 중요한 목표다.

베스트셀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저자인 켄 블랜차드 박사는 최고경영자(CEO)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으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가장 먼저 꼽는다. 확고한 비전이 모두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결집해 강력한 조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동통신사 CEO들은 확실한 비전으로 회사의 성장과 고객 만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내년 초에는 이들의 신년사에서 이동통신사, 나아가 이동통신산업의 새로운 비전을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