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투자 다변화를 위해 헤지펀드를 투자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지난 2008년부터 추진해 왔다. 금융자산의 가격이 하락할 때도 다양한 금융 기법을 통해 절대 수익을 추구하는 헤지펀드는 시장 규모가 2조달러에 이를 정도로 보편적인 투자 대상이다. 국민연금을 제외한 다른 해외 연기금들은 거의 대부분 자산 일부를 헤지펀드에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헤지펀드 투자는 기금운용위원회 위원들의 반대에 7년째 가로막혀 있다. 한 관계자는 "헤지펀드는 스타일과 투자 전략에 따라 천차만별인데도 헤지펀드는 무조건 폭탄처럼 생각하는 위원들의 선입견 때문에 아예 말조차 꺼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최근 복지부는 헤지펀드 투자를 내년 기금운용위원회 안건으로 올려 다시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통과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우리나라 국민의 노후를 담보하는 국민연금이 세계 연기금 중 꼴찌 수준의 수익률을 내고 있는 이유는 연금의 투자 방향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들이 투자 경험이 전무(全無)한 비(非)전문가 집단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직 국민연금 관계자는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기 위해 위원들을 찾아가 여러 번 설명하고 설득했는데도 결국 '내가 잘 모르니 반대하겠다'는 답변을 듣고 한숨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리스크평가위원인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 경제가 3분기 5% 성장하는 등 훈풍이 불면 미국 유망 자산에 투자하는 등 투자 기관으로서 빠르고 명석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현재 국민연금의 구조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10년간 기금운용위원 중 투자 전문가 1명뿐
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장관인 위원장을 포함해 모두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위원장과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차관 등 정부 대표 6명은 당연직, 나머지 14명은 위촉직이다. 본지가 2003년부터 지난 10년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거쳐 간 위원들의 면면을 전수 조사한 결과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부 측 당연직 인사를 뺀 위촉위원 총 66명 중 자산 운용·투자 전문가는 단 1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66명 중 금융권 출신이거나 경제 관료, 경제학자(연구원 포함) 출신은 37명이었고 나머지는 연금 가입자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는 노동조합 대표나 소비자 단체 대표 등 비경제인 출신이 자리를 채웠다. 외식업중앙회, 바른사회시민회의 등 지역 가입자 대표가 추천하는 인사들도 여기 포함된다.
그나마 경제인 출신 37명 중에도 관료나 학자 출신이 19명이었고, 9명은 1년마다 돌아가면서 위원 자격을 넘겨받은 농협중앙회 상무였다. 실질적으로 투자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셈이다. 유일하게 자산 운용·투자 전문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증권감독원 관리국장과 동방페레그린증권 대표이사를 지낸 장영 전 공인회계사회 상근부회장 한 명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환 헤지' 같은 투자의 기본 개념조차 몰라 안건 상정에 애를 먹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기금운용위원회가 각종 이익단체 추천인들로 구성된 것은 국민연금이 전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는 수단인 만큼 가입자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해외 주요 연기금 중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캘퍼스)이 이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캘퍼스는 선거를 통해 이사를 선출하기 때문에 가입자의 의사가 충실히 반영된다. 또 임기 4년에 연임이 가능하고, 회의도 1박2일로 1년에 10차례씩 갖기 때문에 기금 운용에 대한 이사들의 이해도 깊은 편이다. 반면 국민연금은 이사 임기가 2년에 불과한 데다 소속 기관 사정에 따라 수시로 교체된다. 회의도 1년에 4~5차례, 한 번에 2~3시간밖에 열리지 않아 중요한 사안에 대한 의사 결정이 미뤄지기 일쑤다. 또 위원 활동에 대한 평가나 보상 시스템이 없어 열심히 활동할 동기부여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캐나다 연금국민연금은 이사회의 전문성을 중시한 구조다. 12명 이사 전원이 투자은행에서 오랜 기간 실무 경험을 쌓거나 대학에서 연금을 전공한 전문가들이다. 캘퍼스나 캐나다 연금과 비교해 국민연금은 전문성과 대표성 모두 떨어지는 셈이다.
◇위원회 개편 논의 7년째 제자리
현행 기금운영위 체제의 문제점 때문에 2008년부터 기금 운용 관리 체계 개편이 추진돼 왔다. 가령 2008년 정부는 위원회를 금융·투자 전문가 7인으로 구성하고 기금운용본부를 기금운용공사로 독립시키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야 간, 이해 단체 간 입장 차가 커서 아직까지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원종욱 보건사회연구원 실장은 "국민연금이 유동성 프리미엄(투자 기간이 길수록 수익률이 증가하는 현상)을 활용해 수익률을 극대화해야 할 시기에 비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의 소극적 의사 결정으로 많은 기회비용을 날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