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경 지음|돌베개|280쪽|1만4000원
“과학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과학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 책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답은 미국 철학자 샌드라 하딩의 말로 대신한다. “근대 유럽의 역사에서 탄생한 과학은 서양인에게는 ‘우리의 이야기’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타자의 이야기’다.” 저자는 우리가 과학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도 하딩의 말에서 찾는다. 이른바 서양 근대과학이 생산된 역사적 맥락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더구나 서양 근대과학은 ‘식민 지배’라는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과정을 거쳐 한국에 주입됐다.
저자는 그동안 과학 대중화를 위한 책 쓰기에 힘써 왔다. 이번 책도 그 연장이다. 이야기는 근대소설 이광수의 ‘무정’에서 시작한다. 무정에서 이광수는 자조적으로 무식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작가의 투영으로 짐작되는 주인공 형식은 “과학! 과학!”하고 혼자 부르짖는다. 형식과 세 여인은 조선 사람들에게 과학을 줘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자신들 스스로가 과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눈으로 슬쩍 보고 서양 문명을 깨달은 줄로 아는 김장로나 매한가지다.
저자는 주인공 형식이 물리학이나 화학이 아닌 생물학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사회진화론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본다. 일제 식민지배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진화론을 모르면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고, 뉴턴 과학도 모르면서 계몽주의를 부르짖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과학의 역사를 다룬 대중교양서는 많다. 이 책도 그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여느 책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이 땅에 상륙해 전개된 근대 과학의 역사를 우리 눈으로 돌아봤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별한다. 과학주의란 과학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시각이다. 과학주의 관점에서는 유럽 문명이 보편이 되고, 다른 문명은 특수가 된다. 문제는 우리가 식민지배 과정에서 이런 폭력성을 경험하고도 아직 과학과 과학주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도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1877년 중국인 최초로 영국 왕립해군학교에서 수학한 옌푸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해 출판했다. 그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의지해 다윈을 중국에 소개했고, 다윈은 한동안 중국에서 과학자가 아닌 사상가로 알려졌다. 많은 중국 지식인이 사회진화론에 귀 기울인 것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 달라진 국제사회에서 적자생존, 생존경쟁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우리 지식인들도 그 비슷한 문제의식에 사로잡혔던 것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이 책의 각 장에는 우리 근대 문학의 대표작들이 텍스트로 등장한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상의 ‘날개’ 같은 소설들이다. 이 작품들과 서구 근대과학의 발전사를 교차 분석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지워진다. 대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과학을 마주한 당대 지식인들의 소외와 고뇌, 분노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서양 근대과학에 비판적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같이 과학사를 장식한 거인들의 삶과 의미도 압축해서 전달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표는 높다. 서양 근대과학이 축적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며 느꼈던 감정까지 독자들이 공유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