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까지만 해도 디플레이션 논쟁의 핵심은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지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미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에 들어섰다’는 의견과 ‘아직은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대립되며 논쟁이 한 발 더 나갔다.
디플레이션이란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기업 투자와 가계 소비가 위축되고 결국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디플레이션에 진입하는 첫 단추가 저물가인 까닭에 디플레이션 논의가 진행되며 주목받는 곳이 바로 한국은행이다. 물가관리 기관인 한은이 저물가에 대응할 통화정책을 펼칠지에 이목이 쏠려 있다.
하지만 공을 넘겨받은 한은은 진퇴양난이다. 저물가가 이어진다고 반드시 디플레이션이 오는 건 아닌 것처럼 디플레이션의 진단과 처방을 단순히 저물가 현상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은은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는 시나리오가 크게 두 가지라고 판단하고 있다. 먼저 자산 가격이 크게 올라 거품이 형성된 뒤 한순간에 이 거품이 꺼지는 경우다. 1989년 일본 부동산 거품 붕괴로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것과 같은 사례다. 하지만 한은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 경제에 디플레이션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급격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자산 가격이 상승하는 데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가 자산 가격을 띄워 경기를 부양하려고 하지만 정책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다.
한은이 보는 두 번째 시나리오는 기업들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가 우리 경제 성장동력이 크게 꺼지는 경우다. 한은은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에 빠진다면 두 번째 시나리오에 따라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 투자 환경이 크게 악화돼 소위 ‘제조업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발생하면 국내 성장 모멘텀이 사그라지며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급격한 고령화가 더해지면 충격은 더 커진다.
한은이 지난 10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제조업의 해외생산 비중은 18%(2012년 기준)로 일본(20.3%)과 비슷한 수준이다. 2003년까지만 해도 4.6%에 불과했던 해외생산 비중이 불과 10년 만에 4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한은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더 나가 경제가 시들해진다면 여기에 맞는 처방은 기준금리를 내리는 통화정책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대규모 투자에 나서야 할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경우라면 '금리 인하→기업 자금조달 부담·가계 이자 부담 완화→투자·소비 활성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이주열 한은 총재(사진)가 공식석상에서 정부의 구조개혁을 강하게 주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난 10월 이주열 총재는 최근 저물가 상황에 대해 “혹시 구조적인 변화를 간과해 물가 전망을 한 것은 아닌가 한다”고 했다. 저물가를 금리 인하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다만 경기 회복세가 예상보다 좋지 않고 근원인플레이션조차 1%로 내려앉자 한은이 손 놓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판단에 며칠 뒤 열린 10월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하했다. 올해 처음 이뤄진 8월 기준금리 인하는 세월호 사고 이후 정부와의 정책 공조로, 두 번째인 10월 금리 인하는 저물가에 대한 한은의 문제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 기준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인 연 2.0%까지 떨어졌다. 그럼에도 11월 소비자물가는 25개월째 연 1%대 이하 저물가 행진을 이어갔다. GDP (국내총생산) 디플레이터는 2분기에 이어 3분기에도 ‘0’을 기록했다. 여기에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내년에도 1%대 저물가가 이어질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한은은 국제 유가가 올 상반기 수준만 유지된다면 내년 소비자물가가 연 2%대를 기록할 것으로 봤지만 이러한 기대감은 접어야 하는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이처럼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추가 금리 인하를 점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기준금리 추가 인하는 해외자본 이탈과 가계부채 증가라는 두 가지 고민을 던져준다. 특히 지난 8월과 10월 두 차례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경제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리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데 한은은 내심 놀라고 있다. 금리 인하의 효과가 생각보다 크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다고 저물가를 방치할 수 없는 한은의 고민이 깊어지는 시점이다.
조선비즈가 오는 11일 올해 마지막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경제·금융 전문가 17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16명이 현행 연 2.0%인 기준금리가 동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단 1명만이 기준금리가 인하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내년에는 금통위가 추가로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17명의 전문가 중 11명(65%)이 금리 방향은 ‘인하’라고 응답했다. 나머지 6명(35%)은 ‘동결’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