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퇴사를 하냐고 묻는 전화를 수십 통이나 받아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회사에서 눈치도 보이고요. 얌전히 일 잘하고 있다가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입니다.”

차세대 가치투자 펀드매니저로 이름을 점차 알리고 있는 A 자산운용사 대리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최근 자산운용사의 매니저들이 잇따라 퇴사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번에는 누가 회사를 떠나나’ 궁금하던 차에 대뜸 자신을 비롯한 주니어급 매니저 4 명이 한꺼번에 창업을 위해 퇴사를 한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회사를 비롯한 주변에서 한 바탕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이 매니저는 “언젠가 회사를 떠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당장 홀로서기에 나설 마음은 없다”며 “수익률 관리하기도 벅찬데 갑자기 확인되지 않은 퇴사 소문까지 떠돌아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고 씁쓸하게 말했습니다.

증시가 조금씩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투자자문사를 차린 후 금융투자업계의 ‘큰 손’으로 올라선 선배들을 꿈꾸며 잇따라 창업에 나서는 매니저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산운용사들이 이번에는 인력 관리에도 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한 소규모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가뜩이나 요즘 펀드 환매가 늘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핵심 운용인력들까지 이탈하면 회사는 존립 자체가 어려워진다”며 “마치 군대 관심사병을 면담하는 분대장처럼 틈틈이 펀드매니저들을 만나 처우나 어려운 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곤 한다”고 말했습니다.

젊은 매니저들의 퇴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습니다. 채용 후 몇 년간 트레이닝 과정을 거친 끝에 운용을 맡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던지고 나가면 회사 입장에서는 손실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펀드매니저들이 마치 운용사를 창업을 위한 전 단계 정도로 여기고, 경력을 쌓거나 이름을 알리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옵니다.

그런데 펀드매니저들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네요. 최근 트러스톤자산운용과 브레인자산운용 등에서 잇따라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 ‘이번에는 A사의 B차장이 나간다더라’는 ‘카더라’식 소문이 메신저 등을 통해 꼬리를 물고 나오고 있다는 거죠. 이 때문에 창업을 생각한 적도 없는 매니저들까지 입소문에 오르면서 회사 안에서 마치 ‘배신자’처럼 낙인 찍히는 기분이 든다는 사람들까지 많다고 합니다.

펀드매니저들이 섣불리 창업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는 실제로 독립을 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해 3월말 기준으로 투자자문사 수는 154개. 16개사가 새로 생겼지만, 경영난 끝에 폐업한 회사도 19개나 됩니다. 잘 나가는 일부 자문사에만 투자가 몰리면서 절반이 넘는 자문사들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고 하네요.

이 때문에 요즘은 자문사로 나갔다가 다시 운용사로 회귀하는 매니저들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근 배당주 펀드로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는 엄덕기 한국투자신탁운용 팀장도 자산운용사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사례에 속합니다.

그러나 많은 젊은 펀드매니저들 가운데서는 여전히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은 상황입니다. 특히 “한 매니저가 퇴사 후 오피스텔에 부티크를 차려 수십억원을 벌었다더라”는 소문을 접할 때면 상대적 박탈감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최근 장(場)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고 하지만, 2000년대 중반처럼 ‘억 소리가 날 정도’의 성과급을 기대할 만한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운용사에 몸담고 있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고 하네요.

한 30대 펀드매니저는 “운용업계에서는 본부장급으로 올라서지 못하면 대부분 40대 중반 이후에는 현업에 몸담고 있기 어려워진다”며 “젊을 때 많이 벌고 일찍 은퇴하는 게 이 업(業)의 특징인데, 요즘 상황은 가늘고 길게 가는 일반 회사원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창업을 통한 대박의 꿈을 좇느냐, 운용사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을 찾느냐를 고민하는 젊은 펀드매니저들. 쉽사리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경기 상황에서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많은 평범한 직장인들에게는 마냥 행복한 고민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