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공항에서 차로 1시간가량 굽이진 산길을 넘어 가면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에 있는 한 바나나 농장과 마주하게 된다. 이상수·상협 형제가 운영하는 국내 유일의 바나나 농장이다.

이상협씨가 제주도 서귀포 바나나 농장에서 바나나를 수확하고 있다.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수입산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가 접한 바나나는 국산이었다. 당시 제주도 수십여 농가에서 바나나를 생산했다.

그 때만 해도 바나나는 ‘비싼 과일’이었다. “옛날에는 바나나를 먹는 집은 부자집이었지. 어머니께 바나나가 먹고 싶다며 떼를 쓰기도 했어. 하지만 비싸서 먹기가 어려웠다”고 회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제주산 바나나’에 대한 추억이다.

국산 바나나는 1986년 9월 남미 우루과이의 푸타델에스테에서 개최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인 ‘우루과이 라운드’를 기점으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값싼 바나나가 본격 수입되자 국내 바나나 농가들은 바나나 나무를 베어버렸다. 국산 바나나 맛과 품질은 수입산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뒤쳐진 탓에 바나나 농가들을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뒤 20년 이상 국산 바나나는 멸종된 듯 했다. 제주대학 원예학과를 졸업한 이상협씨가 2006년 식품배양을 연구하다 국산 바나나를 생산해 볼 요량으로 다시 키우기 시작하면서 국산 바나나의 명맥(命脈)을 가까스로 이어오고 있다.

국내 바나나 농장은 우루과이 라운드로 수입 바나나가 개방되면서 전멸했다. 이후 멸종 위기에 놓인 국산 바나나 생산을 위해 이상협씨가 2006년 국산 바나나 품종을 개발해 명맥을 가까스로 이어오고 있다.

국산 바나나는 맛과 품질 면에서 수입 바나나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농약이나 합성화학물을 전혀 쓰지 않기 때문이다. 당도도 수입 바나나보다 훨씬 높다.

수입 바나나는 가격이 싸지만 재배 과정이나 수입 과정에서 농약 등이 얼마나 쓰여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수입 바나나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꼬박 1개월. 그동안 바나나는 숙성 작업을 거치는데 이때 일부 업체들은 화학물질을 사용해 바나나를 익히는 후숙(後熟)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주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카바이드(carbide)다. 카바이드를 물에 넣으면 생성되는 에텐 가스가 과일을 익게한다. 카바이드는 탄소 화합물로 인체에 해로운 유독성 가스를 발생하는 화합물이다. 국내에서는 카바이드 사용이 금지됐다. 과일의 후숙에 카바이드를 사용할 경우 작업자의 건강을 해치고 과실에 중금속이 잔류해 안정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상협씨는 “카바이드나 농약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품질은 뛰어난데 가격이 높은 편이어서 판매하기 쉽지 않았다. 농협과 계약하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협씨가 바나나 생산하자 형 상수씨도 화훼농장을 바나나 농장으로 바꿨다. 초기 3년간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국내에서 바나나 품종을 구하기가 어려워 필리핀 바나나 품종을 어렵게 들여왔는데, 나무가 3m 넘게 자라면서 비닐하우스 천장을 뚫어버리기도 했다. 바나나는 온도에 민감한 작물이어서 기온이 20도가 넘는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형제는 비닐하우스 천장을 뚫었으나 온도 조절에 실패, 약 3000㎡에 심어진 바나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상협씨는 “친환경 바나나 재배에 대한 경험도 없고 조언을 구할 곳도 없어 애를 많이 먹었다”며 “배양도 잘 되지 않아 초기 3~4년에는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수확한 바나나들은 후숙작업을 거쳐 소비자들에게 판매된다.

두 형제는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배양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금은 적당한 크기의 바나나 15개 품종을 개발해 키우고 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이 나는 바나나’, ‘전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바나나’ 등 종류가 다양하다.

어렵게 바나나 생산에 성공했지만 유통도 문제였다. 국산 바나나의 가격은 수입 바나나의 2~3배 비싸 가격 경쟁력이 뒤쳐졌다. 이때 ‘국산 바나나의 멸종을 막아달라’며 계약 재배를 제안한 곳이 농협유통이다.

농협유통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이씨 형제가 생산한 바나나(연간 8만5000kg)를 사들여 양재 하나로클럽을 비롯해 각 지역 하나로클럽 마트에서 판매한다.

이근화 농협유통 청과양곡팀장은 “최근에는 유기농 바람이 불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들 사이에서 국산 바나나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계약재배가 없었다면 국산 바나나는 사라졌을 것이다. 농협유통은 앞으로 계약 재배와 매취 사업(조합에서 일괄구매해 조합이 직접 판매하는 방식)을 늘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