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에서 시금치와 열무 농사를 짓는 조영출(44)씨는 요즘 자신의 비닐하우스를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작년 말부터 시세가 워낙 안 좋으니까요. 애써서 길러 시장에 내놓아도 돈을 벌기는커녕 비료값도 못 뽑을 지경입니다." 조씨는 "일부 농가에선 시금치 한 단에 300원도 못 받느니 차라리 밭을 갈아엎어 인건비라도 아끼려 한다"고 말했다.

채소 가격이 안정된 것을 넘어 지나치게 떨어지면서 농가(農家)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올겨울 유난히 따뜻한 날씨로 채소 작황이 좋지만 채소 소비량은 늘지 않아 값이 폭락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생산된 저장 채소도 많아 시세 반등이 쉽지 않다. 도매가격이 1년 전의 절반도 되지 않는 배추나 양파는 4월 들어 하우스 재배 물량이 시장에 나오면 시세가 더 떨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배추 도매가 1년 전보다 71% 떨어져

5일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배추 10㎏의 경매 가격은 평균 2057원이었다. 작년 같은 기간 7138원에 비해 71.1% 떨어졌다. 양파 1㎏은 1년 전 1700원이던 경매 가격이 3분의 1도 안 되는 504원에 거래됐다. 시금치, 양배추, 대파 등 대부분 채소의 경매 가격도 1년 전보다 30~50% 하락했다.

올해 채소 작황은 좋지만 소비량이 늘지 않아 채소값이 폭락하고 있다. 5일 오후 서울의 한 대형마트를 찾은 고객이 채소를 고르는 모습.

자연스럽게 소비자 가격도 내렸다. 5일 서울 경동시장에서 배추 한 포기는 2000원으로 1년 전(4000원)의 꼭 절반 가격이었다. 한 달 전 가격(2900원)과 비교해도 31%가 내렸다. 부산 부전시장에서 양배추 한 포기는 2000원으로 1년 전(4200원)보다 52% 내렸고, 대파(1㎏)는 1800원으로 2800원이던 1년 전보다 1000원이 쌌다.

채소값은 공급이 늘면서 폭락했다. 지난해 태풍 피해 없이 풍년이 들어 생산량이 늘었고, 가격도 내렸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겨울 채소 작황이 예상 외로 호조를 보이면서 시장에 물량이 쏟아진 것이다.

제주에서 양배추와 무를 재배하는 강봉수(45)씨는 "18년간 농사지으면서 모든 채소 가격이 다 내린 적은 올해가 처음"이라며 "작년에 태풍 피해 없이 농사가 아주 잘 된 것이 채소값을 끌어내렸다"고 말했다. 강씨는 "농사는 (궂은 날씨로) 하늘이 30% 정도 물량은 없애줘야 가격이 유지된다"며 "한두 품목 가격이 오르면 다른 채소로 수요가 옮겨가기도 하는데 올해는 모두 싸니 농민 입장에선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반토막 난 채소값… 농민들이 울고 있다<br>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채소 가격의 기준으로 통하는 배추는 2012년 시세가 좋았던 탓에 지난해 재배 면적이 늘면서 가격 하락을 부추겼다. 전남 해남의 한 배추 농가는 "100평짜리 배추밭을 10만원에 가져가라 해도 거들떠도 안 본다"고 말했다.

뾰족한 소비 진작책 없어

채소 가격이 급락세를 보이자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달 25일 정부 비축 물량을 늘리는 것을 중심으로 한 가격 안정 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주의 한 농민은 "겨울 채소가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12월부터 가격 하락으로 손해가 심했는데 2월 말에서야 정부가 대책을 내놓았으니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근 대형 마트들은 농가를 돕기 위해 채소 소비를 늘리기 위한 할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가격이 내렸다고 배추 한 포기 먹던 집이 갑자기 두 포기 먹기는 어렵지 않으냐"고 말했다.

농민들은 채소값 하락이 봄철 채소·과일 시장으로까지 이어질까 걱정하고 있다. 본격적인 출하를 앞둔 하우스 수박은 5일 평균 도매가격이 1만4600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4%나 떨어졌다. 우영문 롯데마트 채소팀장은 "3월 신학기 시즌에 급식 수요가 조금 늘어나는 것을 제외하면 소비량에 큰 변화가 없을 것 같아 당분간 채소 가격은 낮은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