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기적으로 삼성전자의 성장세가 꺾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우리 경제가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구조로 고착되는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지금은 정부·기업·국민 모두 저(低)성장 불감증(不感症)에서 벗어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조선일보가 이달 7~8일 연속으로 내보낸 '삼성전자 없는 대한민국' 시리즈와 관련, 8일 긴급 좌담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삼성전자의 지속적 고성장은 불가능할뿐더러 삼성전자 편중 현상 심화는 경제 건전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반적 경제 체질 개선과 신성장 동력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광회 부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좌담회엔 김형태(53)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이승철(55)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조동성(65) 서울대 경영대 교수, 황철주(55) 주성엔지니어링 대표(가나다 순) 등 재계·학계·금융계를 대표하는 전문가 4명이 참석했다.
◇"삼성전자 실적악화, 경고등 켜져"
조동성 교수는 "삼성전자가 위기를 맞았다는 지적은 반(半)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했다. 지난해 4분기 매출·이익이 줄어 성장세가 꺾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과급 8000억원 지급으로 이익이 줄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조적 위기에 빠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중·장기적으로 중국 시장에서 현지 업체의 부상으로 성장 정체가 예상되고 있는 만큼, 지금 위기가 진행 중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승철 부회장도 "삼성전자에 지금 위기의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착시(錯視)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삼성전자가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은 14%대에 달하고 수출 기여도는 20%를 넘는다. 삼성전자가 구조적 침체에 빠지면 한국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腱)'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은 "고등학교 야구에선 선발투수 한 명과 4번 타자 한 명만 있으면 우승할 수 있어도 프로야구에선 모든 야수가 골고루 잘해야 하는 것은 물론 2·3군(軍)도 필요하다"며 "삼성전자가 위기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대한민국 전체가 심각한 쇼크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태 원장도 "최근에 만난 일본 정부 최고위 관료가 한국 경제 성장에 대해 '삼성이 지나치게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하더라"면서 "삼성이 잘못되면 한국 경제 전체가 한 방에 무너질 것이라는 얘기였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를 여러 회사로 분리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전문가들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삼성전자는 물론 나라 전체가 위기감으로 무장해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삼성전자가 갖고 있는 힘은 기본적으로 자본력과 인력"이라면서 "당장 급하다고 기본을 소홀히 하면 안 되고 꾸준한 연구·개발(R&D)을 통해 3년 후, 5년 후 히트칠 수 있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고 했다.
김 원장은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가 더 이상 높아지지 않도록 여러 회사로 분리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삼성전자의 고속 성장이나 한국의 소득 2만달러 달성은 빵을 위해 토·일요일도 일하는 사람 때문에 가능했지만 빵 대신 가족을 우선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금 같은 방식을 고수하면 삼성전자의 성장은 물론 소득 2만달러 유지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해법의 하나로 생명공학·의료·관광산업 육성을 제시했다. 조 교수는 "생명공학은 IT(정보기술)보다 10배 이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이라면서 "관광산업 경쟁력을 높여 2010년 21억명이던 중국 국내 관광객을 1%만 우리나라로 유인해도 630억달러(약 67조원)를 벌어들일 수 있다"고 했다.
김 원장은 "바이오시밀러(바이오 의약품 복제약) 개발은 복잡한 임상 시험을 거쳐야 해 보통 10년이 걸리지만, 외국에선 한국이 개발 기간을 5년으로 단축할 것이라며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대기업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인식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절실함이 강한 벤처·중소기업의 창조 능력을 인정하고 협업과 개방형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기업·국민 모두 低成長 불감증 벗어나야"
이 부회장은 "우리 경제가 3% 성장도 감지덕지로 생각하는 '저성장 불감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경제가 심각한 불균형에 시달리는 이유는 정부가 성장에서 분배로, 기업이 확장보다 축소 지향적으로 중심축을 옮긴 부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의 건전성을 높이려면 궁극적으로 더 많은 삼성전자가 나오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국민의 반(反)기업 정서가 극심하고 기업을 옥죄는 규제가 범람하는 상황에선 강한 기업이 나올 수 없는 게 자명하다. 이 부회장은 "우리는 그동안 중소기업 보호에 치중하면서 강소(强小)기업, 강중(强中)기업, 강대(强大)기업 육성은 소홀히 했다"면서 "'크면 나쁜 것'이 아니라 '강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 대표는 "우리 기업이 그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규제가 미치지 않는 해외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라면서 "다른 나라만큼 규제 덩어리만 없어져도 민간 부문의 창의력이 넘쳐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규제 친화적 국민 의식 때문에 공무원이 규제를 남발하는 면도 없지 않다"면서 "서비스산업 경쟁력이 높아지지 못한 것도 규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는 뭐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공무원은 국민의 지원을 받아 규제를 남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정치권도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때문에 당장의 국내 문제에 매몰돼 있다"면서 "정치권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갈 희망과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 참석자 약력]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
▲1949년 서울 출생▲경기고, 서울대 경영학과,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미국 피츠버그대 객원교수(1976~1978)▲국제경영학회(AIB) 부회장▲서울대 경영학과 교수(1989~현)▲일본 도쿄대 초청교수▲서울대 경영대학 학장▲한국경영학회 회장▲주 핀란드 명예영사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
▲1959년 경북 고령 출생▲동양공고, 인하대 전자공학과, 인하대 명예공학박사▲한국 ASM 근무(1986~1993)▲1993년 주성엔지니어링 창립▲주성엔지니어링 사장(1995~현)▲브이소사이어티 회원▲벤처기업협회 회장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1959년 부산 출생▲경기고, 고려대 정경대 경제학과,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경제학 석·박사▲고려대 경제학과 강사(1989~1990)▲한국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 실장▲전국경제인연합회 기획본부 본부장▲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2007.4~2013.2)▲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2013.2~현)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1961년 서울 출생▲관악고, 서울대 경영학과 석·박사▲한국증권연구원 부원장(2003.8~2008.4)▲한국증권연구원 원장(2008.4~2009.3)▲한국자본시장연구원 원장(2009.3~현)▲국민경제자문회의 제2기 민간위원(2010.3~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