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서울 중구 충청로3가 지하철 5호선 충정로역 9번 출구 앞. 서울 구도심에서 흔한 낮은 층의 콘크리트 건물 숲속에 붉은색을 띤 9각형 첨탑이 봉곳이 솟아 있다. 첨탑을 쫓아가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 끝에 붉은 벽돌집이 떡 버티고 있다.
근처를 지나는 직장인 중 일부는 붉은 벽돌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첨탑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한다. 낡은 한옥, 60~70년대식 주택 등 낡고 오래된 건물이 밀집한 지역에 ‘이런 건물도 있었나’하는 표정이다.
이 건물은 충정로1주택재개발구역내 충정로 3가 360-22번지에 있다. 현재 ‘충정각’이라는 간판을 달고 갤러리 겸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재개발이 정상대로 추진될 경우 고층 빌딩이 이 건물을 허물고 들어설 예정이다.
건축전문가 아니더라도 충정각을 보면, 창문과 창틀, 계단, 지붕, 정원수 등을 통해 세월의 더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딜쿠샤, 홍난파 가옥, 중명전 등 구한말 일제 강점기 서양식 건물과 비교하면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충정각의 건축주와 건축가는 누구일까?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충정각에 대한 연구 논문 ‘충정로3가 360-22번지 양관에 대하여’을 통해 1912년 토지조사 당시 이 집이 미국인 맥렐란(R.A. McLellan)의 소유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멕렐란은 서울에 전기를 공급하던 ‘한성전기회사’의 기사장으로 1899년 입국했으며, 1902년에는 ‘Electric Light and Power in Korea’라는 제목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우동선 교수는 “맥렐란이 근무한 한성전기회사가 1909년 일본에 매각된 점, 1910년 한일합방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대다수의 서양인이 귀국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멕렐란은 이 저택을 1900년대 초 건립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12년~1919년까지의 건축물 대장에 근거하면 이 집은 구한 말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까지 모두 거치면서도 본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서울의 몇 안 되는 건물이다.
서대문구청에 따르면 충정각이 있는 충정로 3가 360-22번지 일대는 1912~1919년까지 죽첨정 3정목 360번지로 합쳐져 있었다. 1919년 7월 소유주가 멕렌란에서 김규묵씨로 바뀌었고 그해 11월 360-1. 360-2, 360-3으로 분필됐다.
충정각 건물은 당시 360-2번지에 속해 있었으며, 이후 1930년대 초 당시 소유자였던 일본인 타카마츠 류치키는 작은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어서 본 건물에 이어 붙여 사용했다. 타카마츠 류치키는 일제강점기의 특수은행이었던 식산은행의 비서과에서 근무한 인물이다.
충정각을 가장 오래 소유한 사람은 배금순씨로 1956년부터 2007년까지 약 50년을 살았다. 이후 현재 소유자가 매입했고, 현재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충정각이 들어섰다.
현재 충정각은 수령이 100년은 족히 넘을 법한 은행나무와 곧게 뻗은 향나무들이 둘러싸여 있어 고층 빌딩이 몰려 있는 도심 속이지만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많다.
집의 서쪽 면에 베란다와 입구를 두고 남쪽 면으로 아담한 정원이 자리한 이 집은 한눈에도 긴 시간을 견뎌온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앞에 과거 집주인이었던 일본인이 남기고 간듯한 탑·석등·장대석 등이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검은 벽돌로 둥그스름하게 처리한 린텔(lintel) 방식의 창문은 1900년대 초 건축 당시의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택의 주재료인 벽돌뿐 아니라 내부로 진입하기 전 거쳐야 하는 목조 베란다도 마찬가지. 오래된 향나무로 틀을 짠 탓에 썩은 곳이 없어 칠만 새로 한 상태다.
문동수 충정각 대표는 “2006년 레스토랑 개점 준비 당시 일부 보수했지만, 대부분 원형 그대로를 유지했다”며 “1930년대 소유자였던 타카마츠 류키치씨의 아들은 매년 찾아와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을 구경하고 가곤 한다”고 말했다.
1층을 기본으로 다락과 보일러·창고로 이용되는 지하가 주요 공간을 이루는 이 집은 약 710㎡(215평)의 대지에 221.5㎡(67평) 규모로 지어졌다. 지하는 보일러실·창고 등으로 이용됐으며, 층고가 낮은 다락 공간도 마련돼 있다.
내부는 9각형 튜렛(turret·첨탑) 쪽에 난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곧장 벽난로가 있는 홀이 나오며, 동쪽으로 거실과 부엌, 주택 남쪽 면으로 세 부분으로 나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 주택을 실측·연구한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보고서를 통해 “전면에 포치(porch· 건물의 현관 또는 출입구의 바깥쪽에 튀어나와 지붕으로 덮인 부분)가 있고 1층으로 이뤄진 점, 거실 중심형 평면으로 구성된 점을 보면 20세기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며 “건축주가 1900년대 초 한성전기회사 기사장으로 근무하며 막대한 급여를 받았던 맥렐란이었기에 이와 같은 형태의 건축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층고가 낮은 다락은 현재 레스토랑 홀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다락의 천장 부분을 걷어내, 박공형 지붕의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향나무 기둥도 잘 남아 있는 상태다.
문 사장은 “본래 다락은 천장이 덮여 있었고 수납공간으로 짜여 있어 상층부의 건축 방식을 알기 어려운 구조였지만, 이를 걷어내니 100년 전 건축 방식과 집의 뼈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며 “썩은 곳도 없이 현재 사용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고급스럽고 튼튼하게 지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이 집의 설계자를 캐나다인 건축가 고(故) 헨리 볼드 고든(Henry Bauld Gordon)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든은 구한말 개항기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는 몇 안되는 서양 건축가였고, 충정각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인 9각 첨탑과 같은 건축 양식이 고든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1904년 서대문구 도동에 들어선 세브란스 병원을 비롯해 캐나다 토론토에 남아 있는 고든의 작품(로얄 템플러 헤드쿼터)의 첨탑은 충정각의 그것과 쏙 빼닮았다.
우동선 한예종 교수는 “고든은 다른 작품에서도 튜렛 사용을 즐겼다”며 “다만 구한말 개항기 당시 서울에서 활동한 구미 건축가가 몇몇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충정각의 원설계자를 고든으로 확정 짓긴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