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 진관사(津寬寺) 입구. 10월 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서울을 떠받치는 형상의 북한산은 울긋불긋한 단풍이 한창이었다.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계곡을 끼고 쭉쭉 뻗은 소나무 길을 걷길 10분여, 백색 돌다리 너머로 능선을 닮은 팔작지붕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내의 어깨처럼 솟은 암반(巖盤)과 처녀의 걸음마냥 조용히 흐르는 계곡 사이에 들어선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은 수치로 가늠한 규모보다 훨씬 작고 아담해 보였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다목적 공간인 함월당과 방문객의 숙소 역할을 하는 공덕원·효림원으로 구성돼 있었고, 경사진 산세(山勢)에 맞게 차례로 규모가 작아졌다.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을 설계한 건축가 조정구(구가도시건축)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가며 여러 공간을 만날 수 있도록 배치했다”며 “마치 이곳을 걷는 사람이 자연 속에서 주변을 감상하듯 땅의 형국에 맞게 건물을 앉혔다”고 말했다.
◆ 집을 품은 산, 산을 담은 집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
올해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은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은 경북 경주의 명소로 자리 잡은 한옥호텔 ‘라궁’을 설계한 조정구의 최근작이다. 그는 전통건축의 토대에 현대적인 건축 요소를 적절히 적용해 ‘요즘 세상에 한옥은 불편하다’는 인식을 바꿔놓고 있다.
계곡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날 수 있는 함월당은 암반을 따라 세로로 길게 뻗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이뤄진 이 건물은 돌다리 쪽으로 2칸의 대청을 지나면 5칸의 공간이 폭 9m로 기둥 없이 이뤄져 있다. 나머지 2칸은 프로그램 준비공간이다.
내부는 바깥에서 보기와 다르다. 산세에 적당히 들어앉아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한 아름이 넘는 거대한 통나무 보가 위용을 자랑한다. 보와 보 사이에는 연꽃 모양의 대형 등(燈)을 달아 딱딱할 수 있는 내부 공간을 안온하게 했다.
함월당은 첫인상은 단층 한옥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하 공간과 연계된 복층 건물이다. 철근콘크리트조의 지하층이 함월당을 떠받친 형태로, 이 공간에는 식당·취사시설·세탁실·창고가 들어서 있다. 서로 이질적인 건축 양식이 아래위로 결합한 형태지만, 큰 호를 그리며 두 공간을 구분 짓는 콘크리트 슬라브가 지붕 선과 조화를 이룬다.
함월당과 붙어 있는 길상원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공덕원과 효림원이 단차를 두고 자리하고 있다. 한 칸의 대청과 방, 화장실, 작은 부엌이 있는 집이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효림원의 경우 ‘ㅡ’형 집에 누마루가 덧붙여져 3면의 창을 열고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그야말로 ‘차경(借景)’이다.
템플스테이 역사관을 운영·관리 중인 도운 스님은 “이 건물은 기본적인 집의 역할을 잘 수행하면서도 주변 자연의 맥락을 거스르지 않는다”며 “창과 문이 열고 닫을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고 말했다.
◆ ‘구들’도 있고, ‘테라스’도 있는 운중동 M 주택
건축가 조정구는 최근 몇년 간 한옥 작업을 많이 했지만, 일반 단독주택 작업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특히 경기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서 지난해 준공된 ‘M 주택’은 미국식 차고, 현대적인 평면, 전통 방식의 사랑방 등이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이 집은 대지면적 230.50㎡(약 70평), 건축면적 104.28㎡(약 31평) 규모다. 특이한 것은 집의 1층 면적의 절반(40.52㎡)쯤이 차고(garage)다. 자동차·자전거·캠핑에 관심이 많은 건축주의 취미 공간으로 차고 문화가 발달한 전형적인 미국 주택을 연상케 한다.
차고 옆으로 마당으로 진입하는 구간은 2층의 테라스 역할을 하는 나무 데크가 지난다. 집 내부로 들어가는 진입로 역할을 하는 이 구간에 도로와 평행한 테라스를 둬 도로와 집의 경계를 명확하게 한 것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거실 겸 식당이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거실에서 한 단 높여진 사랑방이다. 이 방은 한옥처럼 하단에 설치돼 있고, 방으로 올라가기 편하게 디딤돌이 둬 마치 별채에 온 느낌이 난다.
건축가 조정구는 “집 내부에 1칸짜리 별채를 넣는다는 아이디어가 적용됐다”며 “구들의 난방 효과가 탁월해 따로 난방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기능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평면상으로 1층은 사랑방과 부엌, 차고가 창을 통해 시각적으로 열려 있다. 서로 기능은 물론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공간이 모여 있지만, 두 부부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해 공간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안방과 작업실, 드레스룸 등이 보통 주택과 같이 배치돼 있다. 그러나 안방과 데크 쪽으로 연결되는 중간 공간은 다소 특이하다. 마치 한옥의 대청같이 나무 바닥에 깔려 있는데, 창과 페치카(pechka)가 설치돼 있다. 여름에는 창을 열어 반(半)외부공간으로, 겨울에는 창을 닫고 페치카에 불을 때 전망 좋은 2층 대청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건축주 이미희씨는 “최근 유행하는 미니멀한 스타일의 집보다는 정감가는 소박한 느낌의 주택을 짓고 싶었다”며 “자로 잰 듯 똑똑 떨어지는 공간보단 한옥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살고 싶어 설계를 의뢰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