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가 남긴 유서.


지난달 24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이랜드 NC백화점 매장에서 근무하던 30대 초반의 여직원 A씨가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A씨는 자살하기 전 봉투 뒷면에 유서를 썼다. "내 삶은 여기까지 입니다. 자살입니다. 많이 힘들었고 많이 참았습니다. 엄마 아빠 우리 00씨에겐 미안하지만 여기까지 입니다. 참고 또 참아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일 때문에 힘든 상황을 버텨내기 힘드네요. 이런 생명하나 죽는거 쉽겠지만 더 이상 백화점 일 하고 싶지 않아요.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무엇이 A씨를 힘들게 했고, 자살에 이르게 했을까. 유서에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언급한 '백화점 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 "하루 15시간씩 14일 연속 일하기도"
 
겉으로 보기에 A씨는 목숨을 끊을만한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A씨는 수년간 교제해 온 남자친구와 내년에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자살한 날도 남자친구와 데이트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서울에서 함께 살던 A씨의 아버지는 현재 충북지역에서 건설업체를 두 곳 운영하고 있다. 같이 살고 있는 오빠와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강아지를 좋아해 2마리를 키우고 살았다. 주변에선 A씨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A씨의 동료 등 매장 직원들 중 상당수는 바쁘고 견디기 어려운 백화점의 근무환경이 A씨를 힘들게 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 중요한 원인일 것이라고 밝혔다.
 
취재 결과 이 백화점의 매장 직원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다고 전했다. 백화점의 영업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에서 오후 10시. 하지만 매장 문을 열 준비를 하기 위해 직원들은 보통 8시에는 출근을 해야 하고, 뒷정리를 하다 보면 오후 11시는 돼야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어떤 매장은 직원을 2~3명씩 두고 번갈아 쉬기도 하지만, A씨 처럼 혼자 매장을 담당하는 경우 꼬박 15시간을 근무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A씨는 매니저와 단 둘이서 매장 두 곳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매니저가 외부 업무로 자리를 비울 때에는 A씨 혼자 두 곳의 매장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직원들은 백화점에서 바겐세일 등 '행사'가 잡히는 주간에는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때로 매출 확대를 위해 한 달에 두 번씩 행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행사를 한번 하면 15시간씩 꼬박 14일을 근무한 다음에야 하루 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A씨가 종아리에 하지 정맥류(다리에 혈관이 튀어나오는 증상)가 생겼어도 수술을 차일 피일 미룰 수밖에 없었다는 A씨 가족의 말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A씨 장례식장. 사진

◆ "손님 가장한 '미스터리 쇼퍼' 앞세워 과도한 평가와 징계, 인간 이하 대우 받아"
 
직원들은 과도한 평가 체계와 그에 따른 불이익 때문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백화점 곳곳에는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있어, 백화점은 이 카메라를 이용해 직원들의 근무 태도를 감시했다고 직원들은 전했다. 백화점 직원이 친절하게 고객을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NC백화점의 경우 도를 넘어선 감시와 평가, 징계가 이뤄졌다는 게 직원들의 증언이다.
 
예를 들어 NC백화점은 거의 매주 서비스 평가를 했다고 직원들은 전했다. '미스터리 쇼퍼'라고 불리는 모니터 요원들이 손님으로 가장해 매장의 청결함이나 직원의 서비스를 점검하는 제도다. NC백화점의 평가 항목은 직원의 화장 상태, 두발, 인사 자세, 고객의 요구 파악 등 약 90개 문항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평가에서 점수가 낮으면 사유서를 쓰고 특별 교육을 받았다고 직원들은 전했다. 심한 경우에는 해고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NC백화점의 한 직원은 "20~30분씩 서서 원숭이처럼 인사하는 벌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인간적인 모멸감에 나도 자살 충돌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 따르면 바쁜 시간에 상식을 넘어선 기준으로 서비스를 체크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인사는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십시오' 처럼 두 마디 이상으로 해야 해요. 한번은 계산대에서 바쁘게 정산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을 가장한 감시원이 찾아왔어요. 제가 워낙 바빠서  '안녕하십니까' 라고 한 마디로만 인사했는데, 나중에 보니 인사점수가 영(0)점 처리되어 인사하는 벌을 받았어요."(NC백화점 매장 직원)
 
A씨는 자살한 날 백화점으로부터 서비스 평가 점수를 통보 받았는데, 점수가 기준치보다 낮아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A씨는 남자친구와의 전화통화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는 말을 남겼다.
 
자살한 A씨는 한 고객에게 시계를 60번쯤 채워준 적이 있다고 손님 응대의 어려움을 동료와 가족에게 말했다. 또 고객이 구입한지 오래된 시계를 반품한다고 들고 오면 '반품이 어렵다'고 말해야 하지만, 고객이 화를 내는 것이 두려워 반품을 받아주고 A씨가 카드로 이 시계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A씨의 부친 B씨는 "한번은 딸 아이의 방을 찾았다가 뜯지도 않은 시계박스가 한가득 있어 깜짝 놀랐다"면서 "딸에게 물었더니 백화점 평가가 잘못 나오면 안 돼서 시계들을 그냥 본인 카드로 샀다고 들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평가시스템과 관련, NC백화점을 보유한 이랜드그룹 관계자는 "평가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NC백화점의 CS평가 항목 표

매출과 관련해서도 이 백화점 직원들은 상당수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전했다.
 
이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오후 2시~6시는 손님이 많은 이른바 '집중근무' 시간인데, 이 시간에는 매장을 절대 비우면 안 돼 화장실도 못 간다"면서 "화장실이 급해서 5분 자리를 비웠다가 본사 직원에게 적발돼 20~30분씩 교육을 받은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NC백화점을 보유한 이랜드그룹은 "직원들이 주장하는 집중근무시간이라는 것은 없으며, 이 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교육을 받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 백화점측 "우리와 무관", 정부·국회 뒤늦게 제도화 나서
 
백화점 매장의 판매사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NC백화점만의 문제가 아닌, 업계 전반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4월 롯데백화점 청량리점에서도 매니저로 근무하던 여성이 투신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역시 자살 직전 백화점 관리 직원에게 "그만 괴롭히세요. 힘들어서 떠납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백화점 내 각 팀 담당자인 매출·파트리더의 압박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기준으로 국내 3대 백화점과 3대 대형마트에 파견돼 일하는 입점업체 종업원은 각각 1만3856명, 4만3201명이다.
 
최근 정부도 롯데백화점 판촉사원이 투신한 사건에서 불합리한 관행이 논란이 되자 대책을 마련했다. 백화점이 입점업체로부터 파견 받은 판촉사원에게 무리한 판매 목표를 채우도록 강요하는 것에 제동을 건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일 판촉사원과 관련된 대형 유통업체의 횡포를 막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시행한다고 밝혔다. 가이드라인은 ▲대형마트나 백화점이 판촉사원에게 무리한 판매 목표 달성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파견 받은 판촉사원을 백화점 자체 업무에 동원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하며, ▲입점업체에 매출 목표를 할당하고 실제 매출과 무관한 판매수수료를 수취하는 행위 역시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 국회에서도 최근 백화점이 고객을 가장해 매장 직원을 평가하는 방식이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폐지안을 추진하고 있다. NC백화점의 한 직원은 "매출 문제뿐 아니라 직원들이 기본적으로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랜드그룹 관계자는 "백화점 매장 판매사원에 대한 평가시스템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조사 중이며,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