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4일 새벽 2시 30분 제주도 서귀포시. 주차돼 있던 이 모 씨(40)의 2003년식 싼타페(GVS) 차량에 불이 났다. 차는 전소됐다. 사고 당일 현대차 직원들이 나와 차량을 감식했지만 원인불명으로 결론 내렸다. 이 씨는 재조사를 요구했다. 현대차는 '원인을 밝힐 수 없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결과를 가져오면 대응하겠다'고 답했다.
경찰은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국과수 법과학부에 조사를 의뢰했다. 국과수는 3월 29일 "차량 배터리 단자에 연결된 볼트에서 발화원으로 작용 가능한 전기적 용융흔이 발견됐다"고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국과수 결과를 봤다. 그러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우리가 재조사를 해야 한다. 우리가 자동차 제조사이고 (국과수보다) 더 전문가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씨는 제조물책임법(PL)과 하자담보책임, 비슷한 유형의 사고에 대한 판례까지 제시하며 손해배상을 요청했다.
현대차는 자체 재조사를 받는 게 싫으면 법적으로 대응하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소비자보호원, 법률공단, 자동차소비자연맹이 중재에 나섰지만 현대차는 이를 거절했다. 현대차는 "국과수 결과를 믿을 수 없고, 소보원 중재도 따를 수 없다. 현대차의 조사를 받거나 소송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이 씨는 "소보원 분쟁중재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현대차에 대한 법적 대응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불 붙은 현대차, 너무 많다
올해 싼타페에서 불이 난 사고는 신고가 접수된 것만 5건이다. 지역은 서울 대방동, 광주광역시 치평동·주월동·쌍촌동, 제주 서귀포 등이다. 사고 차량은 모두 시동이 꺼진 채 주차돼 있었다. 최초 발화지점도 엔진룸으로 일치한다.
현대차는 싼타페 화재 사건에 대해 '보증 기간이 지나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현대차 감식반이 차량을 조사했으나 역시 원인불명의 화재로 결론지었다.
외부 충격 없이 발생한 현대차의 화재 사고는 지난 2011년 이후 30여건에 달한다. 차종은 i30·아반떼·쏘나타·그랜저·제네시스·에쿠스·투싼·싼타페·베라크루즈 등 다양하다. 사고의 93% 이상이 엔진룸에서 불이 나며 발생했다.
경찰과 소방서는 차량 화재의 원인으로 방화 등 외부 요인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차량 엔진룸의 배선불량과 배터리 단자 결함 가능성이 화재 원인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현대차는 자체 조사를 벌인 뒤 차량 화재 사고에 대해 '원인불명'으로 결론내렸다.
◆ 현대차 책임 인정하는 법원 판결 잇따라
법원은 차량 화재에 대해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다수의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부(김정학 부장판사)는 2010년 서울 역삼동 그랜저 화재 사건에 대해 지난해 8월 "현대차는 차주 윤 모씨에게 33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냈다.
2011년 6월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은 출고된지 1년 된 아반떼에서 발생한 화재에 대해 "자동차에 하자가 존재한다는 점이 인정되고 현대차에 하자담보책임이 있으므로 차주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선고했다.
지난 5월 일부 개정된 제조물 책임법 3조 1항에 따르면 '제조업자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에게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주홍 녹색소비자연대 정책국장은 "자동차 산업의 폐쇄성 탓에 차량 결함이 발견돼도 소비자가 이를 입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며 "일반 소비자는 경제적·시간적 손실이 크다보니 법적소송에 나서길 꺼려 한다. 정부 차원에서 징벌적손해배상제도 등 처벌 방안을 도입해 제조업체가 스스로 결함이 적은 제품을 만들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