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해양엔지니어링센터'란 생소한 이름의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현대중공업이 드릴십(심해시추선), FPSO(부유식원유생산저장설비) 등 해양플랜트를 설계하는 곳이다. 현재 이곳의 설계 연구 인력은 180명이지만 2016년까지 65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조선업이 2008년 이후 극심한 불황에 빠졌지만 설계 인력은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현대중공업 전체 임직원 수는 2만5400명으로 2009년보다 400명이 늘었지만, 이 기간 설계 인력은 700명(4000→4700명)이나 증가했다.
연구 개발 직군 팽창은 현대중공업만의 일은 아니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 등 한국의 간판급 제조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연구개발 인력을 늘리면서 R&D(연구·개발) 기업으로 대변신 중이다.
◇연구 개발직 채용 붐
2일 본지가 10대 그룹의 주력 회사를 취재한 결과 주요 기업의 R&D 인력이 최근 5년간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국내 직원 2명 중 1명은 연구·개발직군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LG전자는 작년 말 현재 전체 국내 종업원 3만6378명 중 연구·개발 인원이 1만6915명으로 전체의 46%를 차지했다. 5년 전 연구·개발 인원이 1만1888명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42% 급증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국내 연구·개발 인력이 2008년 3만4400명에서 작년 말 4만900명으로 19% 늘었다. 전체 인원에서 연구·개발 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 육박하는 45%에 이른다.
트렌드 변화가 심한 전자업체뿐 아니라 화학·자동차·중공업·철강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LG화학은 2008년 연구·개발 인력이 1100명에서 작년에는 2100명으로 91% 늘었다. 전통적으로 생산직 비중이 높은 현대·기아차도 2008년 연구·개발 인력이 6069명에서 작년에는 8240명으로 35.7% 늘었다.
산업계에선 한국 제조업이 역사상 세 번째 대(大)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 제조업은 1990년대까지 일본 기업을 따라가는 모방의 시기를 거쳐 2000년대 들어 한국 기업만의 제조공정 노하우와 경쟁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중국 제조업의 급부상으로 더 이상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론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시장 선도 고부가가치 제품을 연구하는 연구·개발 직군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다. 이 변신에 성공하지 못하면 신흥 제조국 중국에 추월당하고 일본·독일·미국은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기업 연구 기관 CXO연구소 오일선 소장은 "앞으로 CEO는 연구·개발 직군 출신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주력 기업의 경영전략에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삼성전자의 권오현 부회장과 윤부근 소비자가전부문 사장, 신종균 무선사업부장(사장), 현대차 양웅철 부회장, LG전자의 조성진 가전사업부 사장은 모두 연구·개발 직군 출신이다.
◇"한국본사는 R&D기지 역할 할 것"
R&D 인력을 크게 늘리는 것은 생존 차원의 문제다. 최근 조선산업에서는 바다에서 석유와 가스를 시추·생산하는 설비인 해양플랜트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해양플랜트 세계시장은 2010년 1400억달러에서 2020년엔 3200억달러로 급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 조선업체들이 1조원짜리 FPSO를 수주했을 경우, 5000억~6000억원을 해외에서 설계·기자재를 사오는 데 쓴다. 설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화학업계에선 중국·중동의 범용 제품 생산량이 급증하고 있고, 셰일가스가 개발되면서 미국에서 대규모 화학플랜트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결국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려면 R&D 투자밖에 해답이 없다는 결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조업제들의 국내 본사는 R&D 기지로 점차 변신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최근 수원사업장 연구소 'R5'가 지난달 문을 연 데 이어 서울 우면동 R&D센터, 화성 부품연구동 등을 짓고 있다. 업계에선 "베트남으로 휴대폰 주력 공장을 이전하고, 중국 시안(西安)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서 결국 장기적으로 국내는 R&D 기지로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자동차 전장·전기차·수소차 중심으로 연구·개발 중이다. 과거엔 기계공학과 출신을 주로 뽑았다면 지금은 화학공학, 컴퓨터공학, 무기재료공학 등 무차별로 연구·개발 인재를 뽑고 있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정책연구실장은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제조 능력에서 효율성을 높여 경쟁 우위를 보여왔지만 이에 대한 시효가 끝나가고 있다"며 "앞으론 연구·개발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 승부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