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계열사인 A사는 편의점, 백화점, 대형 마트, 놀이공원 등에 설치된 수천대의 ATM(현금자동입출금기)을 관리하는 회사다. A사는 ATM을 운영하는 핵심 기술은 중소기업인 N사로부터 공급받아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3월 A사의 박모 팀장은 업무상 자주 만나는 N사 직원의 노트북에서 USB를 통해 핵심 기술을 빼냈다. 뒤늦게 기술 유출을 알게 된 N사는 A사를 고소했고 A사 대표와 박 팀장은 지난해 연말 경찰에 입건됐다.

N사 관계자는 "1998년 회사 설립 이후 개발에만 100억원 이상 투입된 기술을 빼앗겼다"며 "기술을 넘겨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을 거절했는데 훔쳐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기술 탈취 여부를 두고 양측이 분쟁을 겪으면서 A사는 N사로부터 ATM 자동화기기 1000대를 공급받기로 한 계약(150억원 상당)을 파기했다. N사로서는 가장 큰 거래처였던 A사와 거래가 중단되면서 매출이 절반가량으로 줄었다. 이 여파로 회사를 떠나는 직원도 속출해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었다는 게 N사의 설명이다.

일러스트=김현지 기자<br>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부가 N사처럼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억울하게 기술을 빼앗기는 사태를 막기 위해 도입한 것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이다.

2011년 7월 도입된 이 제도는 부당하게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앗으면 손해액의 3배를 배상하게 한 것이다. 실제 손해보다 더 많은 돈을 배상하게 하는 제도는 미국을 제외하면 채택한 나라가 거의 없다. 그만큼 파격적이고 확실한 기술 탈취 예방책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제도가 시행된 지 2년이 다 되도록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아낸 중소기업의 사례가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아 유명무실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소기업 사이에서는 "대기업들이 더 교묘하게 기술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원성이 계속 나오고 있다.

계약 전에 교묘하게 기술 빼앗아

먼저 정식으로 하도급 계약을 맺기 전에 교묘하게 기술을 빼앗아 오는 경우가 많다. "설계도를 한번 보자"라든가 "샘플을 갖고 와 보라"는 식으로 유도해서 납품을 원하는 중소기업이 기술의 일부를 보여주면 해당 기술의 핵심을 슬쩍 가로채는 수법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게 공정거래위원회나 중소기업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이런 경우 하도급 계약을 맺기 이전이기 때문에 법적인 보호를 받기가 쉽지 않다. 기술·보안 전문가인 구태언 변호사는 "대기업이 납품받던 중소기업의 핵심 기술을 계열사나 다른 중소기업에 넘겨준 다음에 '더 싼값에 납품받을 수 있어서 거래처를 바꿨다'며 형식상 하자가 없도록 꾸미면 기술을 뺏긴 쪽에서는 대응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법률적인 기술 탈취의 범위가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요구한 기술'로 한정돼 있어서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이 기술 자료를 대놓고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김승일 중소기업연구원 전략경영연구실장은 "징벌적 손해배상의 범위를 '대기업에 의해 부당하게 유출된 기술'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력을 빼가는 방식의 기술 빼앗기도 여전하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이동통신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C사는 최근 몇년간 입사 3~5년차의 연구기술 인력 33명을 대기업이나 경쟁 업체로 빼앗겼다. 이 회사의 전체 직원은 200명에 불과하다.

거래 끊길까 봐 대기업에 못 맞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갑을 관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약자인 중소기업이 피해를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 대기업을 상대로 싸우기 시작하면 거래처가 대부분 끊기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여도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는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아예 사업을 접어야 할 정도로 회사가 망가진 상태가 아니라면 대기업이 기술을 빼앗아갔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공정위와 중소기업청이 중소기업 204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2.1%인 45곳이 대기업으로부터 기술을 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중 66.7%가 기술을 일부 제공했다고 답했고, 11.1%는 기술 전체를 제공했다고 응답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대기업이 기술을 빼앗았으면서도 다른 일감을 주면서 문제 삼지 말라고 회유하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거절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피해 입증 책임도 중소기업에 있어

정작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해 피해를 구제받으려고 하더라도 승소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도 중소기업에는 부담이다. 기술이 부당하게 유출됐다는 정황을 원고(原告)인 중소기업이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대기업은 기술 탈취를 계획할 때부터 형식상 탈법이 되지 않도록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기 때문에 검찰이 수사해도 버거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소송에 들어가면 대기업 측이 대형 로펌에 사건을 맡긴 뒤 재판을 몇년씩 끌어 중소기업을 고사(枯死)시키는 경우도 잦다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