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제철은 오는 28일 주주총회에서 전 포스코 회장 황경로씨 등을 사외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을 공시했다. 황씨가 재선임되면 1999년부터 15년째 이 회사 사외이사를 지내게 된다. 이건우 전 산업자원부 관리관도 1998년 이 회사 사내이사로 선임된 이후 동부건설·동부하이텍 등 계열사를 옮겨다니며 계속 사외이사를 해왔다. 사외이사가 직업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회사가 올린 이사회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거나 견제를 한 사례는 거의 찾기 힘들었다.
한국 기업이 1998년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한 지 15년이 지났다. 재벌 대기업의 방만한 경영으로 외환위기를 초래해 IMF(국제통화기금)가 '사외이사'제를 도입하라고 권고한 게 계기가 됐다. 하지만 오너나 최고경영자의 독단적 결정을 견제·감시하기 위해 도입한 사외이사가 취지와는 전혀 다르게 방만한 경영과 독단적 결정을 합리화시켜주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동시에 권력기관 출신들의 노후 안식처 역할을 한다는 비판도 많다. 이 때문에 사외이사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제도 무용론·폐기론까지 거론되는 상황을 맞았다.
◇독립성 잃어버린 사외이사
민간 연구기관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위원장 김우찬 KDI 경영학과 교수)는 올 들어 동부제철 등 주총을 앞둔 30개 기업의 사외이사 후보 82명 중 46명에 대해 선임 반대 의견을 냈다. 판단 기준은 회사 측과 이해관계가 있는지 여부다. 사외이사를 10년 넘게 했는지, 최고경영자와 동문 관계 등 특수관계이거나, 회사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조직에 몸담고 있는지도 따졌다.
지난 22일 주총을 치른 현대산업개발에서도 사외이사 3명 선임 과정에서 비슷한 논란이 일었다. 이정훈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이번에 임기 3년을 더함으로써 총 12년간 사외이사를 역임한다.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은 정몽규 회장과 고교 동문이며, 박순성 김앤장 변호사는 정몽규 회장의 배임혐의 관련 재판에서 변호인 역할을 했었다.
◇15년간 좌표 잃은 사외이사
미국에서는 사외이사를 경영진과 이해관계가 없는 '독립이사(disinterested executive director)'로 이해한다. 이지수 미국 변호사는 "미국 판례를 보면 한 기업이 기부금을 특정 대학에 많이 냈는데, 그 대학 출신이 사외이사로 왔다고 해서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성은 말할 것도 없다. 경쟁사 최고경영자가 상대방 기업 사외이사로 일하는 경우도 흔하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2006~2009년 경쟁사인 애플의 사외이사로 활약했을 정도다.
현행 법률에 의하면 자산 2조원 이상의 회사는 사외이사가 과반수로 구성된 추천위원회에서 사외이사 후보를 결정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실제론 기업 총수나 최고경영진이 '편하고 믿을 만한 사람을 데려오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데려오다 보니 전문성도 떨어진다. 우리나라 4대 금융지주 사외이사 34명 가운데 10년 이상 금융회사 재직 경험을 가진 사람은 1명뿐이다. 유럽 대형 은행들은 10년 이상 금융회사 재직 경험이 있는 금융 전문가를 적어도 3분의 1 정도 배치하고 있다. 이시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회사 돌아가는 내용도 모르는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을 감시까지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대대적인 제도 보완 필요
사외이사를 없앨 수는 없다. 사내 경영진의 독단을 견제할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임횟수 제한, 추천위원회 구성, 사외이사 활동 평가 등에서 제도 혁신이 필요하다. 각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있다.
스웨덴은 소액주주대표 1명 이상을 사외이사 추천위원회에 포함시키도록 했고, 이스라엘은 주총에서 선임하는 사외이사 중 1명을 반드시 소액주주 측에서 선출하게 했다.
경제개혁연구소 위평량 박사는 "박근혜 정부 출범 전에는 소액주주가 독립적으로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했다가, 요즘에 이를 거론하지 않고 있다"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