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대형마트나 기업형 수퍼마켓(SSM)에서 팔지 못하도록 권고하는 품목 51종을 지난 8일 발표했다. 채소 17종, 신선·조리식품 9종, 수산물 7종, 기호식품 4종, 정육 5종, 건어물 8종에다 종량제 봉투까지 포함했다.
서울시는 다음 달 초 공청회를 열어 업계와 시민 의견을 수렴한 뒤 국회에 관련 규제 근거를 마련할 법 개정을 요청하기로 했다. 서울시 방침대로 규제 근거가 마련되면 이르면 올 연말부터 대형마트에선 관련 품목을 판매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서울시 권고대로 이 제품들을 대형마트나 SSM에서 팔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빚어질까?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대형마트에 51개 품목이 사라졌다고 가정하고 장을 봤다. 장보기 메뉴는 손님 초대용으로 자주 하는 해물찜과 파전 재료, 사골 미역국, 콩밥, 맥주와 소주, 안줏거리로 말린 오징어채와 대구포로 정했다.
◇해물찜 하려는데 마트에서 콩나물 살 수 없어
지난 18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대기업 계열 A마트로 차를 가지고 출발했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지만 해물찜 재료에 맥주·소주 무게까지 감안하면 차가 필요했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쇼핑 카트를 끌고 지하 2층 식품 코너로 갔다.
채소 코너를 먼저 들렀다. 해물찜에는 콩나물·미나리·고춧가루·마늘·대파 등이, 파전에는 대파·홍고추, 사골 미역국에는 마늘 등이 필요하다. 물론 다 팔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시 권고를 충실하게 따를 경우 문제가 발생했다. 우선 미나리·고춧가루·홍고추는 살 수 있었지만 콩나물·마늘·대파는 살 수 없었다. 판매 제한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채소류 중에선 풋고추·상추·오이·애호박·양파·감자·고구마·시금치·배추·양배추·무·열무·알타리무도 판매 제한 품목이다. 옆에서 장을 보던 주부 이모(46)씨는 "그럼 삼겹살 구워서 쌈 싸 먹으려면 마트에 왔다가 다른 데 또 장을 보러 가야 하겠네?"라고 말했다.
이어 수산물 코너로 이동했다. 해물찜 재료로 오징어·바지락·새우·대합·홍합을 생각했고, 매장에서 모두 팔고 있었다. 하지만 새우만 살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제한 품목이었다. 매장 직원은 "갈치와 꽁치, 고등어, 낙지, 생태도 판매 제한 품목"이라고 말했다.
해물찜 육수를 내기 위한 멸치, 미역국에 들어갈 사골과 미역, 안주로 쓸 오징어채와 대구포도 제한 품목이어서 살 수 없었다. 콩밥에 들어갈 콩도 제한 품목이어서 쌀만 샀다. 소주·맥주·막걸리도 제한 품목이어서 주류 코너에 진열된 것만 보고 돌아 나왔다.
◇재래시장, 사골·도가니 안 판다
오후 5시 8분. 마트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B재래시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입구 쪽 상인에게 "차는 어디 세우느냐"고 물으니 "길가에 주차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길가는 이미 차가 빽빽하게 주차돼 있어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 차를 세우고 걸어서 시장으로 다시 나왔다.
장을 보기 시작한 것은 5시 45분. 사골을 사기 위해 정육점에 들렀으나 주인은 "사골은 잘 안 팔려서 안 갖다 놓는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대형마트 판매 제한 품목으로 권고한 우족·도가니·소머리고기·소힘줄도 없었다.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주인은 "여기 시장은 작아서 구하기 어렵고 규모가 큰 C시장에 가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C시장은 B시장에서 차로 30분 정도는 떨어져 있다.
마트에서 사지 못했던 대파·양파·오징어·바지락 등 채소와 수산물은 모두 있었다. 그러곤 건어물 상점으로 갔는데, 대구포가 없었다.
말린 오징어채는 1근(3.75㎏)에 9000원. 저렴했지만 마트처럼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다.
마트에서 사지 못한 맥주와 소주를 사려고 했으나 시장 내 상가엔 술을 취급하는 상점이 없었다. 시장 상인은 “안쪽에 있는 할인마트로 가라”고 했다. 시장 안쪽에 있는 D마트에서 맥주와 소주를 샀는데 배달을 하려면 2만원어치 이상 사야 한다고 했다. 이미 장을 본 짐이 너무 무거웠던 터라 술은 사지 않고 6시 10분 집으로 향했다. 술은 집으로 돌아와 짐을 내려놓고 다시 근처 편의점으로 나가서 샀다.
장보기를 완전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6시 30분. 장 보는 데 꼬박 2시간 30분이 걸렸다. 그 사이 집을 두 차례나 왔다 갔다 했다. ‘대형마트 한곳에서 장을 봤으면 50분이면 끝났을 것이고, 재래시장에서 두루 아이템을 갖추고, 주차장 시설까지 돼 있었으면 더 싸게 물품을 구매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쇼핑이었다.
맞벌이 생활을 하는 김모(37)는 “서울시 권고대로라면 퇴근 후 차를 몰고 마트에 잠시 들러 한꺼번에 장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대형마트를 규제하려면 영업일이나 영업시간 규제로 접근해야지 판매 품목 규제는 소비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조치여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