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정부 예산(豫算)은 '길이가 짧은 이불'이라는 말이 있다. 어깨를 덮으면 발이 시리고, 발을 덮으면 어깨가 차다. 돈이 나올 구멍은 빤한데, 돈 쓸 곳은 너무 많아 예산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복지 정책을 위해 5년간 135조원을 풀겠다고 공언했지만, 예산 담당 부처는 아직 재원 마련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재정 현안은 기초연금, 4대 중증 질환 보장, 보육 확대 등 온통 복지 얘기뿐이다. 마치 '재정=복지 문제'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계속 높아져 왔는데 왜 복지를 확대하라는 요구는 갈수록 늘고, 재정의 역할에 기대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걸까?

◇GDP 늘어나도 삶은 더 고달파, 왜?

우리나라 경제는 지난 수십년간 플러스 성장을 해, 국민 대다수의 삶은 과거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활이 고달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왜 그럴까? 따져 보면 이런 불평엔 다 근거가 있다. 무엇보다 옛날보다 돈 쓸 곳이 크게 늘었다.

우선 교육비 부담이 훨씬 커졌다. 80년대 초반 과외 금지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닌 필자는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님은 사교육비 마련하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맬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자녀 있는 가구의 지출 수요 중 으뜸은 단연 교육비다. 또 집값 상승 탓에 내 집 마련 비용도 크게 늘었다. 예전엔 두 사람이 신혼살림을 시작해서 30대에도 집을 장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부모 도움 없이는 40대조차도 내 집 장만이 어렵다.

이처럼 돈 쓸 곳은 더 많아졌지만, 대다수 국민에게 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소득 양극화로 근로 빈곤층이 두꺼워진 탓이다. 근로 빈곤층이 두꺼운 이유는 우리나라가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뒤 산업사회 단계를 오랫동안 거치지 못한 채 곧바로 탈산업사회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소득 양극화 낳은 탈산업사회

20세기 후반부터 서구 사회는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전환했다. 지식 경제와 서비스 경제가 특징인 탈산업사회는 누구나 일하기만 하면 웬만큼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는 일자리는 대기업 공장이나 단순 사무직의 정규 일자리다. 산업사회에서는 이런 일자리가 풍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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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탈산업사회는 아니다. 생산성 향상과 공장 및 사무자동화는 이런 일자리를 대폭 줄였다. 정보화에 따라 타이핑, 서류 정리 등 단순 사무직 일자리는 사라졌다.

반면에 높은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 일자리와 단순 서비스직 일자리는 늘었다. 중간 계층 일자리가 주는 대신 상ㆍ하위 계층 일자리가 늘어난 것이다. 문제는 전문직 일자리는 소수만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다수 사람에게 개방된 일자리는 단순 서비스직 일자리이다. 일자리 양극화와 소득 양극화가 초래되는 이유이다.

산업사회에서 정부의 성장 정책은 왕성한 기업 활동이 가능하도록 기반만 조성하면 되었다. 일자리 창출과 노동자 생계는 시장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탈산업사회에서는 달라졌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에 직접 나서야 했다. 직업훈련과 교육을 통해 수요 변화에 부응하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해야 했다. 보육과 노인 부양 지원을 통해 근로 빈곤층의 부담을 완화하고 여성 고용률을 높여야 했다. 이런 사회구조 변화 때문에 복지 관련 정부의 역할에 대한 목소리가 계속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 소득재분배 기능 미흡

우리나라는 주요 선진국과 달리 재정의 소득분배 기능이 유난히 취약하다. 정부의 소득분배 기능은 정부 개입으로 빈곤율이 얼마나 감소하였는가로 측정할 수 있다. 빈곤율은 가구 소득을 줄 세웠을 때 중간 지점에 있는 중위 소득의 50% 이하인 가구 비율을 의미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회원국을 대상으로 정부 지원이 없는 순수한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한 '사전 소득 빈곤율'과 정부의 복지 재원이 투입된 이후의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한 '사후 소득 빈곤율'을 비교했다. 두 빈곤율의 차이는 정부 재정이 얼마나 빈곤 감소에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분석 결과 2010년 현재 사전 소득 기준으로는 우리나라의 빈곤율은 17.5%로 회원국 중에서 가장 낮다. 하지만 사후 소득 기준으로는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높은 15.2%나 된다. 사전 소득 빈곤율과 사후 소득 빈곤율 차이는 회원국 중에서 가장 작은 2.3% 포인트다. OECD 평균이 16.0% 포인트이니 우리나라 정부가 재정을 통해 빈곤 감소에 기여한 부분은 OECD 평균의 7분의 1 수준밖에 안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빈곤 문제 중 특히 심각한 것은 노인 빈곤이다. OECD 회원국의 노인 빈곤율 평균은 10.3%인데 우리나라는 45.1%다. 노인 빈곤층에 대한 정부 지원이 그만큼 시급한 문제라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 재정으로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기 십상이다. 복지 관련 재정의 역할을 강화하되 미래 세대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 연금과 의료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출산율을 높여 미래의 납세자인 근로 세대를 키우는 정책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