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금융권이 저성장·저금리의 쓰나미에 허우적거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잃어버린 10년'의 중턱쯤 왔을 때다. 80년대 후반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경제 성장률이 추락하자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뒤늦게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급속히 내리기 시작했다. 1991년 7월 당시 연 6%였던 정책금리는 1995년 9월 연 0.5%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기업 대출은 오히려 감소했다. 부동산 버블 붕괴의 여파로 기업들이 빚을 갚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기업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4배에 육박했으나 이 비율은 90년대 중반 반토막이 났다.
◆ 日 저성장·저금리 악순환‥금융기관 동반 부실
일본은행은 1999년 2월 단기 금리를 0%에 가깝게 유도하는 이른바 '제로금리' 정책을 실시한 데 이어 2001년 3월 국채 매입에 나서는 등 전통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정책까지 펼쳤다. 돈을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빌려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성장이 멎으며 소득이 오르지 않자 개인들 마저 빚으로 집과 차를 사는 것을 중단했다. 은행들의 전체 대출금은 2000년 460조엔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6년 400조엔까지 감소했다.
주수입원인 대출이 급감하면서 은행들의 수익성은 급격하게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시장금리가 예금금리 보다 더 빠르게 떨어지면서 이런 추세를 가속화했다. 그 결과는 은행의 몸집줄이기와 업계 재편으로 이어졌다. 은행의 실핏줄인 지점은 2001년 1만5000여개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1만3000개로 감소했고 같은 기간 35만명의 은행권 종사자는 28만명으로 줄어들었다. 22곳에서 이르렀던 대형은행들은 미즈호, 미츠비시UFJ, 미쓰이스미토모 등 ‘3대 메가뱅크’로 재편됐으나 이 마저도 덩칫값을 못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저성장·저금리의 여파로 은행들이 돈을 굴릴 곳이 사라진 것도 문제였다. 일본 주요 도시·지방은행들의 대출잔액과 국채보유액을 살펴보면 1997년까지는 은행의 대출과 국채는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인식되며 같이 움직였지만 1998년부터 국채 보유비율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저성장의 여파로 주식·부동산 투자가 더욱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 역마진 보험업계 '직격탄'
이 같은 문제로 직격탄을 맞은 곳은 보험사들이었다. 금리가 수직낙하하면서 고객에게 주는 돈 만큼 운용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역(逆)마진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보험업계는 경영난에 허덕거리며 1999년과 2000년 사이 중·대형 보험사들 6곳이 2년 새 줄도산을 맞았다. 이로 인해 보험업계의 종사자수는 2001년 64만명에서 2006년 54만명으로 15% 감소했다. 특히 생명보험업의 타격이 커지면서 종업원수는 40만명에서 30만명으로 25% 가까이 줄었다. 화재보험업계의 경우도 11만명에서 9만명으로 15% 감소했다.
푸르덴셜 등 미국·유럽계 보험회사가 구원투수로 나섰고 정부는 ‘일본판 금융빅뱅’이라고 불리는 금융규제 완화를 통한 ‘경쟁 촉진’을 해법으로 내세웠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본 보험회사들의 수익구조는 10년이 지난 최근 들어서야 숨이 트이게 됐다고 한다. 보험 계약기간의 한 사이클이 돌고 신규 계약건수가 늘어난 영향이다.
◆ "고령자 상품 개발하고 자산 이전 제도 마련해야"
고령화가 굳어지면서 일본 금융권이 최근 눈을 돌리는 곳은 돈을 움켜쥔 60대다. 일본은 60대 이상이 전체 금융자산의 60%를 보유하고 있다. 보험업계의 관심도 과거 '사망 보험'이었다면 지금은 노령층이 늘어나며 연금 형태로 생활비를 줄 수 있는 분배금 형태의 상품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일본의 금융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금융권도 은퇴·고령자를 위한 상품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금리·저성장 환경에서는 ‘재테크’의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돈이 안전자산에만 쏠리는 현상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또 50~60대의 자산이 밑 세대로 흘러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50대와 60대는 우리나라 전체자산의 30.7%와 27.4%를 갖고 있다.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미야모토 사치코 노무라 금융연구소 연구원은 “젊은 세대의 소비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윗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돈을 넘길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예를 들어 교육비를 목적으로 자산을 넘길 때 세제 혜택을 준다든지,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자산 운용을 할 때는 비과세 혜택을 주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