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신사동 가로수길의 아담한 사케집 '쿠노요'. 트래디셔널(정장) 캐주얼풍의 옷에 체크무늬 재킷을 걸친 50대 남성이 "방금 막 수염을 정돈하고 왔다"면서 자리에 앉았다. 빨간색 신발·양말·벨트에 트랜디한 안경까지, 딱 봐도 '이 사람 패션 좀 아는구나' 라는 느낌이다.

박호준 대표는 30명 정도 수용 가능한 작은 사케집을 운영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직업이 있다. 바로 '광고 모델'. 55세 나이에도 한 달여 전에는 연예인들도 탐내는 화장품 광고에서 단독 주연을 맡았다. 스킨푸드의 '딸내미 상견례 전날'편에 등장한 중년의 남자가 바로 박 대표다.

그가 출현한 텔레비전 광고만 8편. 웬만한 연예인보다 광고를 더 많이 찍은 셈이다.

가로수길은 유독 광고·의류·사진 업계 관계자들이 많이 드나드는 장소다. 박 대표가 운영하는 사케집에도 평소 광고 관련자들이 자주 방문한다. 그가 광고를 찍기 시작한 시기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골이던 한 광고감독이 술을 마시러 왔다가 대뜸 "박 대표는 일본 간지(일본어에서 유래한 비속어로 패션 센스가 넘친다는 뜻)가 많이 난다"며 자신의 광고에 모델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박 대표는 2008년 SK텔레콤의 생각대로 광고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한국투자신탁운용의 트루프랜드· 한국 시티은행·처음처럼·일동제약·스킨푸드 등의 텔레비전 광고를 촬영했다. 삼성전자, 아레나, 여성중앙을 포함해 신문과 잡지에 메인모델로 나온 적은 수없이 많다. 이제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제법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광고 모델 전문 에이전시인 레디엔터테인먼트에도 소속돼 있다.

벌써 5년차 광고모델인 그는 "100년도 못사는 인생 즐겁게 살자는 마음 자체가 나의 경쟁력"이라며 "광고모델을 포함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일반인 50대 모델 가운데서 A+급이라고 평가되지만 "CF 모델은 100% 취미"라고 강조한다.

튀는 의상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이전 직업은 '의상디자이너'다. 트래디셔널 캐주얼을 유독 좋아했던 박 대표는 신한인터내셔널 폴로랄프로렌, 제일모직 빈폴, 동일레나운 까르뜨블랑슈에서 MD·마케팅·상품기획자 등으로 재직했다. 빈폴이라는 이름과 자전거를 타는 로고가 그의 작품이다. 그는 한국에 트래디셔널 캐주얼을 정착시키는데 한몫했고, 쌍방울에서 속옷 디자인을 하면서 '한국 남성 란제리 디자인 실장 1호'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박 대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본에 가는 것을 즐겼다. 특히 일본 사케를 너무 좋아해 일본에서 폴로 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사케집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다.

20~40대를 의상과 함께 보낸 박호준 대표는 25년간의 직장 생활 끝에 사케집을 선택했다. 박 대표는 "마지막 직장인 쌍방울에서 재직할 당시 프랑스를 오가던 비행기에서 문득 '내가 50인데 더는 인생을 주저할 때가 아니라 내가 제일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사케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면서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먹고 사는데는 큰 지장은 없지만, 앞으로도 광고모델은 그만 둘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일반적으로 광고 업계에서는 일본 남자들이 한국 남자보다 좀 더 간지가 난다는 이유로 인기가 많다"며 "외국 친구들한테 그런 면에서 자존심 상하는 게 싫고 한국인 대표 50대로서 광고촬영은 계속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의 경우 회사 직무교육에 수염 다듬는 방법 등 패션 코디법을 알려주는게 문화로 자리 잡았다"며 "한국 남자들도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쓰면 경쟁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