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미국의 극심한 가뭄 등으로 인해 촉발된 국제 곡물가격 상승 여파가 이르면 다음 달 국내 먹거리 물가에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식품업계는 해외 곡물가 상승이 국내 식품가격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약 4개월로 분석한다. 식품업체마다 가격 변수를 고려해 일정량을 비축해 두기 때문이다. 7월부터 미국발(發)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 본격화됐으므로 국내에서는 다음 달부터 식품값 대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애그플레이션이란 주요 농산물 가격이 인상되면서 전체 물가도 급격히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 7월 "내년 1분기까지 밀가루는 30.8%, 전분 16.3%, 유지류는 11.2%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대경제연구소는 "올해 말까지 두부나 장류 등 곡물을 재료로 한 소비재 가격이 집중적으로 올라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 물가 상승폭이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곡물가 상승이 유제품·고기값까지 올린다

롯데제과
는 최근 과자 14종 출고가를 평균 9.4% 올리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제과업계 1위가 전격적으로 가격 인상 계획을 밝히자 제과·제빵·라면 업체 등에선 "다음 (가격 인상) 타자는 누구냐"는 말이 나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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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그플레이션 여파는 콩·옥수수·밀 등을 주재료로 하는 식품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분야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곡물가가 오름세를 유지하면 사료값도 덩달아 올라간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농가는 가축을 대량으로 내다 팔거나 도축한다. 도축량이 늘면 단기적으로는 공급이 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육 두수가 줄어 고기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애그플레이션의 진원지인 미국에선 이미 고기값 파동이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세계 최대 돈육업체 스미스필드푸드(Smithfield Foods)의 래리 포프(Pope) 최고경영자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돼지고기와 소고기 등 육류 가격이 10% 이상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미 농무부는 내년에 소고기와 유제품은 4~5%, 돼지고기는 3% 안팎의 가격 인상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가격 인상 속도가 빠른 닭고기는 당장 올해 안에 최대 4.5% 선의 가격 오름세를 보인다는 관측이다. 사료를 대부분 수입하는 우리나라 역시 미국과 같은 과정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내 축산농가의 총생산비 대비 사료비 비중은 한우 40%, 돼지 50%, 닭 60% 선이다.

◇곡물가 불안은 수출에도 악영향

고기뿐 아니라 유제품 가격도 불안하다. 서울우유 등 유업체들은 지난해 11월 원유값 상승분을 반영해 우유값을 10% 안팎 올렸다. 우유업체 관계자는 "우유값은 대체로 3년에 한 번 올려왔지만, 최근 사료값이 워낙 뛰는 바람에 조만간 다시 가격을 올리는 업체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우유 시장은 3조5000억원 규모. 우유를 재료로 한 커피·빵·아이스크림·유제품·분유 등 2차 제품까지 합치면 우유값 상승 후폭풍은 가공식품 전반에 불어닥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반복되는 국제곡물가격 파동' 보고서를 통해 "중국에서 사료값 상승이 돼지고기 값을 밀어올리는 '피그플레이션(pigflation)'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밀과 옥수수를 자체 생산했던 중국은 고기 소비가 급증하면서 가축 사료 수요가 크게 늘어나 밀·옥수수 수입국으로 돌아섰다. 문제는 피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뛰면 중국 내 경제 성장이 둔화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중국을 주요 해외 시장으로 삼은 한국 기업들이 수출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커진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우리나라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물가 변동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곡물가 상승으로 소비 심리가 둔화되는 것은 중동 등 다른 신흥시장도 마찬가지다. 애그플레이션을 체감하는 고통은 저소득 국가일수록 훨씬 심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Becker) 시카고대학 교수는 "식량 가격이 30% 상승하면 고소득 국가 생활수준은 3% 하락하지만, 저소득 국가 생활수준은 20% 하락한다"고 말했다.

☞애그플레이션(Agflation)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한 말. 곡물가 상승에 따라 물가가 급격히 오르는 현상을 뜻한다.